[칼럼/참빛칼럼]인터콥 이슈 |
기사입력 2011-09-24 오후 6:16:00 | 최종수정 2011-09-24 오후 6:16:00 |
올 초봄에 “다윗의 장막의 영”에 대한 이슈가 제기되어서 이에 관한 칼럼을 썼었던 기억이 아직도 가시지 않았는데 요즘 재차 같은 문제를 또 이슈화 삼고있는 교계의 현실이 퍽 답답하게 느껴진다. 이런 동일한 문제거리 제기의 빌미로 어떤 선교단체를 볼모로 삼고있는 듯한 모습마저 비춰져 너무 유감스럽고 씁쓸하기 그지없다. 관련 칼럼 기고자는 표제를 바꿀때마다 새로운 사람들을 공격의 대상으로 선보이며 참으로 많은 다양한 원색적인 표현들을 현란하게 구사하지만 전체적인 내용을 종합해보면 순환적 논리로 인한 동어반복이 주를 이루는데다 쟁점의 원인은 너무도 단순한 바 ‘개념 이해’에 대한 차이로 파악되며 종국에는 스스로 자기논리적 모순에 빠져 상대를 인정하는 설명을 하고있다. 참고로 부언하자면, 순환논리에서의 원인은 복수로 검증이 되어야한다. “인터콥이 이단인 이유는 IHOP을 좋아하는데 IHOP이 이단이기 때문이다” 라고 하는 주장이 성립되려면, 인터콥을 이단이라고 하기 전에 IHOP의 이단이 증명이 되어야 하고,또 다른 곳에서 IHOP을 이단이 아니라고 하는데가 없어야 하는 것이다. 만약 다른 곳에서 IHOP을 이단이 아니라고 하는데가 있다면 인터콥은 이단이 될수 없는 것이다. 또 마찬가지로 IHOP이 사도적 신앙의 계승자가 되려면 성경에 충실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므로 사도적 신앙의 계승자가 아니며 그러기에 이단이라면, 두가지가 증명이 되어야한다. 첫째는, IHOP이 성경에 충실하지 않다는 것과 둘째는, 성경에 충실하지 않은 것이 이단이라는 증명이다. 그런데 ‘성경의 충실’에 관한 이슈는 성경 해석의 다양한 관점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체험적 은사’까지 연결되므로 폭넓은 조명이 필요하다. 성령의 음성을 듣는 것이 일상화된 신앙인이 있는 반면에 이것을 ‘정체불명의 괴음성’으로 여기는 신앙인도 있기 때문이다. 또 ‘성경충실’을 주관적인 소견에 가두어 ‘이단’으로까지 연결시키는 발상은 다분히 논리의 비약을 넘어선 논리의 부조리라 생각된다. 첫번째의 불충실한 성경적인 이슈중 대표격으로 거론되는 것이 ‘다윗의 장막의 영’이며, 예언은사와 신부운등이므로 이에 관한 소견을 피력하고자한다. 한편 순환논리에서 원인을 증명하려면 계속 원인규명이 점층적으로 확장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안에 ‘안전지대’의 심리때문이라고 한다: “즉, 우리는 안전지대를 넘어서서 원인을 확장하려 하지 않는다. 안전지대를 넘어서는 것은 불확실성의 세계에 진입하는 것이고 이러한 불확실성은 그 존재만으로도우리의 판단력을 마비시킬 수 있다. /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안전지대 안에서 더 이상 다른 결과가 없다면 찾는 것을 포기하고 동어 반복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 하지만 안전지대를 넘어서서 생각하는 것을 멈추지 않도록 훈련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원인을 아무리 확장하고 싶어도 확장된 원인들은 언젠가는 다시 수렴하게 되어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왜? 라는 질문을 통해서 도달한 원인이 추상적 실체를 포함하게 된다면 그것을 올바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진실이 아닌 가설일 뿐이다(구글 펌 “테스팅 히치 하이커 안내서”)” 위의 내용에서 ‘불확실성의 세계에 진입’과 ‘판단력 마비’의 표현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던져주는가? 본질적으로 불확실한 ‘하나님 나라’에 대해 우리의 ‘판단력’을 함부로 사용하지 말것을 시사하는 주의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또 ‘추상적 실체’를 ‘진실’이 아닌 ‘가설’로 이해하여 원인무효화 시키는 자세에 우리 기독신앙인은 큰 교훈을 얻어야 한다. 왜냐하면 ‘신학’은 ‘초월적 실체’를 다루기에 이 보다 더 폭넓은 이해를 요하며 신중에 신중을 요하는 분야이기 때문인것이다. 세상학문에 임하는 자세도 이와 같은데 하물며 하나님의 학문임에랴… 1)최근 이런 류의 논리를 펴는 분의 ‘다윗의 장막의 영’에 대한 이슈제기는 대략 다음의 세가지로 요약된다: 1. 24시간 ‘다윗의 장막의 영’의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전 시절의 개념이다. 2. 하나님을 방치하지 말고 24시간 기도와 찬양속에 거하게 한다는 법궤시대의 신앙개념이다. 3. 다윗의 장막은 신약후 우리 몸속에 들어왔다. 삶과 인격과 생활의 전 영역 속으로 이동되었다. 성령께서 친히 오시고 내주하는 것이 다윗의 장막이다. 답변을 드리지면 다음과 같다: 1. 다윗의 장막의 영’은 바로 ‘성령 하나님’이시므로 예수 그리스도 전이나 후나 똑같다. 2.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법궤에만 모셔졌다는 개념은 불충분하다. 구약의 하나님의 영도 보편적인 성령역사의 기록은 아닐지라도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70인 장로와 엘리사의 기도등 사람들에게 역사한 많은 예들이있다( 민11; 겔2,3; 단4,5,6.). 이것을 부인하면 도리어 양태론적 이단이 된다: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베푸시며 땅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신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사42:5)”/ “에스겔 39장 29절은 "내가 다시는 내 얼굴을 그들에게 가리우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내 신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쏟았음이니라(겔39;29)” 3. “다윗의 장막은 신약후 우리 몸속에 들어왔다. 삶과 인격과 생활의 전 영역 속으로 이동되었다. 성령께서 친히 오시고 내주하는 것이 다윗의 장막이다.” 라고 설명함으로써 실제 문제 제기자는 ‘성령께서 친히 오시고 내주하는 것’과 ‘다윗의 장막’을 동일시 하고있다. 그러므로 ‘다윗의 장막의 영’으로 기도하는 것은 문제가 될수 없다는 것을 시인한 셈이다. 2)두번째로 예언은사는 구약적 예언자적 개념이 아닌 신약적인 예언은사로서 말씀과 기도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신앙인에게 나타나는 것이기에 훈련과 시행착오가 따른다고 본다. 즉 특별계시의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개인적인 영적 교제의 수단으로서 주어지는 것으로 이해해야한다. 그리고 예언의 내용은 개인에게 향한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인것으로 운명론처럼 노력없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것이다. 순환논리의 함정인 모순적 사고는 이런 류의 예에서도 두드러지는데 뉴욕 모교회의어떤 목사님이 사도적 사명을 받았다는 예언을 받고서 도리어 교회를 사임하게 되었으니 받은 예언이 틀렸다는 주장이다. 3)세째로 지적한 ‘신부 정체성 회복’은 지극히 성경적인 내용이며, 크리스찬인 우리는 천국을 열망하며 저마다 하나님의 특별대사라는 엘리트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해, 영혼구원을 위해 고군분투하며 아가서의 말씀대로 음부보다 강력한 사랑으로 무장하여 세상의 악을 제압해야 할 그리스도의 군사로서의 사명이 있는 것이다. 이런 내용은 요한계시록 뿐만 아니라 성경 도처에 있는 내용이기에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고있는 일반성도들이라면 이미 거의 알고있는 지식이다. 그러기에 혹자가 비난하는 바. 거짓, 허황, 미혹, 불건전, 착각, 마귀, 엘리트의식등과는 거리가 먼것이다. 성경은 확고부동한 영분별의 기준을 요한일서의 말씀(4:1-6)을 통해 제시하고있다. 예수그리스도가 성육신 한것을 믿고 고백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임이 증명된 자들이라고 말씀한다. 세상에 속한 자들은 세상의 말을 듣지만 하나님께 속한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분별해야 한다. 당시 거짓 선지자는 사도와 대립한 자들로서 신인양성을 부인하는 영지주의 이단사상자들이었고, 거짓 사도들은 율법준수를 구원의 조건으로 가르치는 자, 성령의 풍성한 능력이 나타나지 않고 계시의 복음 대신 자기 말을 전하거나 사심으로 섬기는 자들이었다(고후11). 아마 바울의 기준으로 보면 현세대의 목회자들도 거짓 사도의 수준에서 자유로울 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반문하지 않을수 없을것 이다. 깊이 관찰하면 교회안의 이단도 엄밀히 존재한다고 보아야한다. 이와같은 현실을 고려하여 성경은 다소 까다롭지 않게 이단 규정을 세워놓은지도 모른다. 한편 걸핏하면 예언과 선지자의 종속여부의 이슈로 혼란을 만들어내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처사라고 생각한다. 사도적 영성이 승계되듯이 예언자적이고 선지자적 영성도 얼마든지 승계될수 있기 때문이다. “그날에 내가 우상의 이름을 이 땅에서 끊어서 기억도 되지 못하게 할것이며 거짓 선지자와 더러운 사귀(邪鬼)를 이 땅에서 떠나게 할 것이라(슥13)”과 요엘서(2:28)의 말씀이 이를 시사하고 있다. 스가랴서의 말씀은 메시야 시대에는 친히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성령으로 말씀하시는 시대가 도래할것을 예언한 것이고, 요엘서의 말씀은 예언과 꿈과 비전이 오늘날에도 있는데 다만, 오늘날 일반적으로 주어지는 예언, 꿈, 이상은 특별계시의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개인적인 영적 교제의 수단으로서 주어진다고 이해를 하면 되는 것이다(요엘2:28). 그러므로 예언이 틀리다고 가짜 선지자니 성토할 이유가 없는 것은 그 비판자체가 구약의 특별계시적 선지자 개념을 오늘날에도 인정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짜 사도나 가짜 선지자는 예수의 성육신을 인정치않는 이단신앙에 적용되어야 한다고 본다. 기독 신앙에서 특별히 강한 성령의 역사의 체험으로 예언적이고 선지자적 은사를 받은 리더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전하는 음성을 어디까지나 그들이 개인적으로 하나님과의 교제중 받은 음성으로 참고하면 되는것이다. 요컨데 중요한 핵심은 하나님과 친밀한 영적교제인 것이며, 영적체험도 등한히 할수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성육신을 믿음으로 고백한 바, 개인적인 영적체험을 나누는 믿음의 형제들을 이해가 안간다고 해서 무턱대고 영분별의 잣대로 비판하는 자세는 정도에서 벗어난 무분별한 처사라 생각되는 것이다. 40일 금식기도를 한 형제는 그렇지 않은 형제보다 마음의 자세도 남다르고 자연 성령의 은사와 체험이 풍성할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성령의 역사가 풍성하다고 해서 가시적인 역사만을 추종한다든지 말씀이 약한 것으로 깎아내리는 우를 범해서는 안될것이다. 인격문제 운운 하는 것도 무리인 것은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시므로 겉으로만 판단해서도 곤란하기 때문이다. 요즘같이 교육수준의 균등이 이루어진 세대엔 이런 형제들에게서 더욱 말씀의 능력도 함께 풍성하게 넘쳐난다는 것을 깨달아야할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는 그들의 체험을 존중하고 경청하고 나누고 또 부족한 것은 서로 돕는 태도가 바람직한 것이다. 신앙생활에 남다르게 생명을 걸고 총력을 기울이는 형제들이 있다면 저들을 위해 기도해줘야 할 우리가 도리어 자신의 활약으로 주님의 재림을 준비, 성취하는 것처럼 착각한다고 비난의 화살을 쏘아대는 것은 기우요 넌센스라 생각한다. 저들이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라 주장하지 않는바에 비록 그렇게 보인다 할지라도 걱정할게 없음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오직 예수님이 하시기 때문인것이다. “그는 아무 때에나 오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전 세계의 하나님의 사람들이 성령의 기름부음 아래에서 신부의 정체성을 가지고 중보를 부르짖을 때까지 오시지 않습니다.” 비판의 글로 올린 이 내용이 필자에게는 한없는 소망이 되고 격려와 도전이 됨을 고백하지 않을수 없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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