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0년 동안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시기에 아랍세계에서 아랍민족주의 지도자들은 하나 하나 참살되었다. 1950년대 이집트 나세르 대통령이 총으로 암살을 당했고, 10년전 이라크 사담후세인이 참살되었으며, 리비아 가다피는 작년에 처참하게 죽었다. 마지막 남은 아랍민족주의 지도자 아사드 대통령이 이끄는 시리아는 내전이 갈수록 격화되고 시리아는 초토화되고 있다.
그리고 아랍민족주의의 마지막 보류,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는 어제도 오늘도 총소리가 요란하고 폭음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한다: 하나님 언제까지이니까? 언제까지이니까?
왜 이리도 중동사태와 팔레스타인 분쟁문제는 해결될듯 해결되지 않고 또 해결될듯 해결되지않는 것인가? 그것은 두 가지 고질적인 난제가 해결되지않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유대인-아랍인의 배타적 민족주의 배경을 가진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가 미제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하나는 민족주의를 넘어서는 보다 근본적인 영적인 문제, 4천년 전 예루살렘 아브라함의 가정에서 시작된 이삭과 이스마엘의 갈등으로 시작되어 오랜 역사 속에 지속해 온, 지구 최대의 딜레마라 할수 있는 <예루살렘의 평화> 문제가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미제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1948년 이스라엘 민족의 국가재건 이후 중동 이슬람세계는 국제정치의 중심축으로 떠올랐다. 중동문제는 정치·사회적으로는 중동 이슬람국가들의 이스라엘국가 공인 문제와 팔레스타인의 국가 분리문제로 집약된다. 중동아랍 이슬람국가들의 입장에서는 아랍세계 내 유대민족 국가의 등장은 결코 용인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랍인들에게는 2,000년 전에 거주했던 땅으로 돌아와서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거주민을 몰아내고 국가를 세운다는 것은 국제법상으로나 도의적으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불법적 행위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시간이 흐를수록 이스라엘의 주장이 오히려 국제사회에서 지지를 얻고 있는 것이다. 서구국가들은 물론이고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요르단 등 중동 아랍 국가들도 이스라엘의 입장을 수용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지금은 시리아와 이란만 강력 반대하고 있을 뿐 사실상 대부분의 아랍국가들은 수용 또는 묵인하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에는 팔레스타인 당국 역시 이스라엘 국가 인정과 팔레스타인 분리 독립국가 건설을 거의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며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초기에는 말도 안된다며 분노하던 아랍인들도 차츰 국제사회 현실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그러면 법적으로나 도의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이스라엘의 주장이 이렇게 아랍세계에서조차 점차 사실상의 지지를 얻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이스라엘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하는 미국의 정치적 압력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팔레스타인 난민문제로 인한 아랍세계 내부의 분열이 더 큰 이유라 할 수 있다. 아랍세계가 끝까지 단결했다면 이 정도까지 상황이 반전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팔레스타인 난민문제는 무엇인가? 팔레스타인 문제는 레바논에서 시작되었다. 1948년 레바논에 대한 프랑스 위임통치가 끝나자 이스라엘 국가 수립을 계기로 난민으로 전락한 수만 명의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레바논으로 몰려왔다. 이후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시리아로도 대거 유입되었다.
이렇게 레바논과 시리아가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수용한 것은 단순히 피난민 수용 차원의 정치적 배려만은 아니었다. 레바논,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모든 아랍 국가들은 과거 오스만제국 통치 시기부터 영국 및 프랑스 통치를 받기 전까지는 '한 영토 한 무슬림 국가' 개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스만제국 때는 지배자 터키인이니 피지배인 이란인이나 아랍인들 모두 그들은 단순히 '무슬림들'이었다. 그러나 19세기 오스만 터키의 통치가 서서히 막을 내리고 아랍세계를 영국 및 프랑스가 식민통치하게 되면서 '우리는 무슬림이다'는 전통적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19세기에 아랍 세계에 프랑스와 유럽으로부터 아랍세계로 민족주의 개념이 도입되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아랍 무슬림이다'라는 인식이 아랍세계에 급속히 재구성된 것이다. 그리고 이후 아랍무슬림들은 하나의 공동체(움마)라는 인식이 지배적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아랍세계는 서구제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시작했다. 이스라엘 국가수립으로 인해서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이웃 레바논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때 레바논에는 다른 아랍세계와는 달리 기독교정당이 정권을 잡고 있었다. 1952~58년 레바논 대통령 카밀레 샤문Camille Chamoun이 이끄는 기독교 정권은 몰려오는 팔레스타인 난민들 중 기독교인들에게만 레바논으로의 귀화를 허용했다. 당시 레바논 정보부 책임자로 있던 마론 기독교Maronite Christian 지도자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어떠한 정치활동도 허용하지 않았다. 대부분이 농민 출신인 팔레스타인인들은 레바논에서 공사장이나 허드레 일로 생계를 유지했다.
1950년대에 이집트 대통령 낫세르는 아랍연맹의 비전 실현과 범아랍 민족주의를 확산시키기 위해 전 아랍 세계를 대상으로 'Voice of the Arabs'라는 라디오 방송을 송출하고 있었다. 이스라엘 민족에 대항하는 낫세르 대통령의 아랍 민족주의 운동은 레바논 내 팔레스타인인들 사이에 아랍민족주의 열망을 불러일으키고 반유대인 정서가 격화되면서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정치적으로 무장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아이젠아우어 독트린>(1957년)을 견지하고 있던 레바논 샤문Chamoun 기독교정권은 낫세르의 범아랍주의 담론을 거부했다. 급기야 1958년 레바논에서 내전이 발발하였고 파드 셰합Fouad Chehab:1958-1964에게 정권이 넘어갔다. 셰합 정권이 레바논 내 친 아랍계 순니 무슬림들의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친 아랍노선을 일부 수용하였다. 그러나 기독교 세력이 강한 레바논 군軍 정보부는 팔레스타인 난민 캠프를 철저히 감시하며, 아랍 민족주의 노선의 정치적 활동을 강력히 통제했다.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난민 캠프를 벗어나서 다른 지역을 여행할 때는 허가증을 받도록 조처했다.
그러나 레바논 내 난민캠프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갈수록 전투적이거 호전적으로 변모해 갔다. 급기야 1967년 이스라엘이 아랍군을 완패시키면서 레바논 내 분노와 긴장은 극도로 높아졌다. 마침내 1969년 11월 3일 레바논과 이집트 사이에 <카이로 협정>이 체결되면서 팔레스타인 난민에 대한 사회적 권리, 난민 캠프 내 정치적 자치권 및 이스라엘에 대한 무력 투쟁권이 주어졌다. 단 무력행동은 레바논 군부와 협의 하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제한했다. 이리하여 카이로협정 이후 레바논 내 팔레스타인 캠프는 반反 이스라엘 무력투쟁 기지로 변화하였다.
예상했던 대로 카이로 협정 이후 레바논은 정치적 혼란에 빠져들었다. 좌파 두르즈Druze 그룹은 아랍 종교적 파벌이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레바논 내 순니파 이슬람 세력은 서구제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지금까지 마론파Maronite 기독교가 독점해 온 정치적 리더십을 순니파와 나누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순니파 무슬림들은 레바논 군부가 이스라엘에 대항하여 싸워야 하는데 오히려 팔레스타인인들을 통제하려고만 한다고 강력히 비난했다.
아랍 무슬림들은 레바논 군부의 이러한 행태는 마론파 기독교인들이 레바논 군부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라며 비난의 공세를 높였다. 그러나 레바논 마론파 기독교인들은 레바논의 정치적 통일성과 사회적 안정이 팔레스타인 무력투쟁으로 깨어지는 것에 대해 극도로 긴장하고 있었으며, 기독교 군부 세력은 기독교 전통이 압도하는 레바논 국가의 정체성 'the Real Lebanon'을 지키려고 힘쓰고 있었던 것이다.
1970년 '검은 9월' 사태 이후에 레바논 내 팔레스타인 난민캠프 상황은 더욱 더 통제 불가능한 상황으로 빠져들어 갔다. 이웃 국가 요르단 내 하심파Hasimite 군부는 요르단으로 들어온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구축한 팔레스타인 독립투쟁 기지를 완전히 전멸시켜 버렸다. 요르단 군부는 요르단 내 팔레스타인인들의 반 이스라엘 무력투쟁 기지가 존재하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았다. 이러한 요르단 군부의 강경정책 때문에 팔레스타인 전사들은 레바논 내 팔레스타인 난민캠프로 대거 이동하였으며 이 난민캠프를 군사 기지화하기 시작했다.
한편 레바논에는 순니파 아랍 이슬람 세력이외에 PFLP(the Popular Front for the Liberation of Palestine)나 DFLP(the Democratic Front of the Liberation of Palestine)와 같은 좌파 아랍 민족주의 세력도 있었다. 당시는 이집트, 시리아, 이라크, 리비아, 레바논 등에서 순수 아랍민족주의를 주창하는 아랍인들은 대개 좌파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었고 친소련 노선을 추구하고 있었다. 레바논 내 이들 좌파 아랍민족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 난민 캠프 기지화를 통한 반 이스라엘 투쟁에 관심을 갖기 보다는 레바논 내 사회주의 공화국을 건설하는 데 주력했다. 그들은 당시 베트콩North Vietnam 모델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팔레스타인 파타Fatah당 지도자 아라파트에게 레바논 내 좌파아랍주의 정치운동인 카말 줌블라트Kamal Jumblatt의 아랍민중운동National Movement에 대해 지지를 해줄것을 호소하기도 했다. 이리하여 좌파아랍주의자 줌블라트는 PLO(Palestine Liberation Organization) 의장인 아라파트가 피에르 게마일Pierre Gemayyel이 주도하는 대표적 레바논 기독교 정당Kata'ib Party과 친선관계를 맺으려고 하는 것을 방해하였다. 당시에는 팔레스타인 그룹 지도자 아라파트와 그의 정당 PLO 파타당은 친 기독교적 노선을 지향하고 있었다. 아라파트나 팔레스타인 정치지도자들이 이슬람 독립투사로 생각하는 것은 큰 오해이다. 지금도 팔레스타인 정치지도자들은 대개 친기독교적이다.
레바논의 마론파 기독교인들은 만일 자국 내에 팔레스타인 무슬림들의 영구적인 정착이 고착화 되면, 1943년 레바논 내 마론파 기독교인 집단과 순니파 무슬림 집단 사이에 체결된 국민협정이 무력화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었다. 그 협정은 레바논 내에서 기독교인들의 정치적 주도권과 리더십을 인정하는 것을 기조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레바논 마론파 지도자들은 레바논으로 피난해 온 아랍 난민들이 거주민tawtin에서 시민watan으로 바뀌는 상황을 경계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랍인들의 영향력이 증대되고 상대적으로 기독교인들의 정치적 입지가 약화되기 때문이다. 만약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레바논 시민으로 정착하게 되면, 무슬림 인구가 증가하여 기독교인들은 무슬림들의 지배하에 놓이거나 외국으로 이민가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은 레바논 내 기독교인들이나 팔레스타인인들 모두에게 제로섬 게임이 되는 것이었다.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때가 되면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기를 원하고 있었는데, 레바논 시민이 되면 팔레스타인 시민으로서 권리를 상실하고 영구히 레바논 사민으로 살게 되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팔레스타인 회복이나 독립은 포기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1970년대 초반 기독교인인 레바논 대통령 술레이만 파란지에Sulayman Franjiyyeh는 레바논 내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대항하는 기독교 민병대를 지원하였다. 그는 기독교 민병대를 활성화함으로써 기독교 집단 내에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경계심을 조장해 나갔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레바논은 마론파 기독교, 순니파 아랍무슬림, 좌파 아랍무슬림, 팔레스타인 난민 등 여러 그룹으로 나뉘게 되었고 레바논은 분열되어 전사 집단화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975년 4월 레바논 내전이 발발하였다.
한편 이러한 와중에 아라파트가 이끄는 PLO는 시리아와 대립하였다. PLO는 시리아가 팔레스타인을 희생시키고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을 것이라는 의혹을 제기하였다. 시리아에 대한 이러한 아라파트의 비난은 아랍세계 내에서 시리아의 정통성과 위상을 크게 손상시켰으며 또한 시리아의 영향력을 훼손시켰다.
분노한 시리아 아사드 대통령은 1976년 6월 레바논을 침입하여 좌파 순니파 그룹 국민전선과 PLO 군대를 제압하고 코너에 몰린 레바논 기독교세력을 살려냈다. 국제사회와 UN이 시리아의 레바논 침략을 비난하자, 시리아는 레바논 내전을 이용하여 이스라엘이 레바논에 침공하는 것을 막기 위한 선제조처였다고 둘러대며 자신들의 레바논 무력침공을 정당화했다.
2004년 아라파트 사후 팔레스타인 파타당은 그동안의 투쟁노선을 접고 태도를 완전히 바꾸어 급기야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고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건설을 추진하였다.
이집트는 이미 1970년대 중반에 미국과의 <캠프 데이비드 협정>을 통해 이스라엘을 인정하였으며,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 왕조국가들은 겉으로는 이스라엘을 비난했지만 사실상 언제든지 명분만 있으면 이스라엘을 공인할 준비가 되어 있다. 내전으로 고통하는 시리아는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빼앗긴 골란고원을 넘겨받고 자국 내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가 해결되면 이스라엘을 인정할 가능성이 많다. 이란 홀로 이스라엘을 반대하며 레바논 내 친 이란 시아파 무슬림 그룹 헤즈볼라Hezbollah를 동원하여 간간히 투쟁을 전개하고 있었으나 역부족이었다. 중동 이슬람 세계는 팔레스타인 문제를 놓고 처음부터 내부 분열을 거듭해 왔던 것이다.
이렇듯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진입으로 시작된 팔레스타인 문제는 팔레스타인 난민문제의 해법을 놓고 견해와 노선 차이가 갈수록 벌어지고 이에 따라 아랍세계가 분열하면서 오랫동안 수렁에서 헤매고 있다, 이렇게 아랍세계가 분열하며 갈등하는 사이 신흥국가 이스라엘은 빠른 속도로 자리를 잡아 갔으며, 강력한 정착국가로 발전하였다. 탁월한 이스라엘 정보부와 강력한 CIA의 협력 작전, 그리고 갈수록 절대 권력으로 성장하는 미국 내 유대인 그룹의 정치적 및 경제적 힘을 아랍세계가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다. 오히려 정예화된 모사드의 비밀작전과 미국의 정치적 영향력으로 인해 아랍세계는 갈수록 지리멸렬 하고 있다.
사우디, 요르단, 쿠웨이트 등 아랍 무슬림 왕조국가들은 이미 철저히 거세되었으며, 아랍 좌파 민족주의 지도자 이라크 사담후세인과 리비아 가다피는 비참하게 참살되었고, 시리아는 내전으로 초토화되고 무력화되고 있다. 작은 도시 가자지구로 내몰린 팔레스타인 투쟁전사들은 지금 꺼져가는 마지막 투쟁의 불꽃을 태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머지않은 아주 가까운 시기에 팔레스타인은 드디어 평화가 올 것이다.
최바울선교사(인터콥 본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