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경화된 기독교이단사이비 대책기관에 대한 경고
주님의교회 김상태 목사(Th. D.)  

들어가는 말

최근 뉴욕 교계는 사이비 이단연구 및 대책 위원회라는 이름 아래 온갖 부정적인 언론 시비로 소모적인 논쟁을 일삼고, 비방과 인신공격으로 상대방을 흠집 내어 소중한 인격을 파괴하며, 반기독교적인 분위기가 만연하여 쓰나미처럼 위험수위에 이르게 된 것을 통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본래 뉴욕은 LA 지역과는 달리 한인사회가 매우 보수적인 전통을 가지고 있어서 정치와 경제, 문화와 기독교 신앙의 측면에서도 매우 안정된 기반을 갖고 있는 지역적인 장점과 이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독특한 대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지역적인 특수한 성향으로 볼 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뉴욕과 뉴저지 지역의 사이비 이단 척결위원회 목회자들은 이단 연구실이 아닌 이단대책과 대처방안의 실질적인 행동으로서 기독교 이단인 구원파(박옥수)의 대대적인 포교활동과 메트로포리탄(metropolitan) 지역의 대형집회에 대하여 목숨을 걸고 반대 시위를 했고, 한국교회가 가장 우려하고 있는 무서운 사이비 이단집단인 신천지의 침투에 대해서도 정보입수나 성도들을 보호하기 위한 대책 마련에 긴장감을 늦추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이단 대책이나 대처 방안에 대한 구체적인 활동은 객관적인 측면에서도 매우 고무적으로 효력 있게 잘 수행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Kansas State에 소재한 국제기도의 집(IHOP)과 관련된 뉴욕 N교회의 목사 사임 과정에서 대두된 신사도 운동에 대한 신학적 비판과 IHOP에 관한 2011 1월 뉴욕 세미나를 쟁점으로 매우 어설프지만 공명심을 최대한 발휘하여 확산된 것이 기독교 이단 연구 및 대책에 대한 폭넓은 기폭제로 작용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정황에서 미주의 4개 이단연구단체가 주축이 되어 더욱 효과적인 이단 대책 사역을 목적으로 세력 확장과 서로 연대구축을 하기 위해 소위 세계한인기독교 이단대책 총연합회(약자-세이총)가 유령처럼 갑자기 출범되어 그 절정에 달했습니다.  물론 일부 기독교 인터넷 사이트인 특정 언론도 호기를 만난 듯이 대중들의 관심을 최대한 끌어들이기 위하여 사업상 전략적인 이득을 생각하고, 교회와 하나님 나라 확장에는 안중에도 없이 분별력 없는 저돌적인 언론 게임에 적극 협력한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자명한 사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최근 들어 갑자기 사이비 이단대책위원회가 미주에서도 동서를 막론하고 그 세력을 확장해 가며, 기독교 안에서도 많은 혼란과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점이 매우 심상치 않아 보입니다.  한국 근대사에 역사적인 공헌을 세웠고, 국가 발전의 기초를 마련했던 민주주의 투쟁운동도 처음엔 독재정권에 맞서서 국민의 인권과 자유를 호소하는 순수한 동기로부터 발단이 되었지만, 그 목적과 방법을 달리하는 불순한 사람들이 가담하게 되자, 결국은 좌경화로 뿌리 깊은 국가적 암초가 형성되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대한민국 남한 전역이 불법시위와 파괴, 무질서와 방종, 국가적인 발전에 발목을 잡는 미래 없는 반국가적 독초들이 싹을 내며, 국가안보에 구멍이 뚫리고, 극단적 이기주의가 만연하여 갈등과 좌절 속에서 소모적인 국가운영체제와 안전을 상실한 대 혼란기를 경험하고 있는 것처럼, 사이비 이단대책기관 안에서도 좌경화의 거센 파도로 인한 영적인 손실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극한 상황에 도달하지 않았나 하는 위기의식까지 느끼게 됩니다.  

목회자가 교회 사역에는 안중에도 없고, 영혼구원에 무관심하며, 열심히 성경의 진리를 배우고 전하기에 바쁘기보다는 부분적인 꼬투리를 잡아 남을 정죄하고 비판하기에 열심이며, 끌어내리고 망가뜨리며, 분별력 없는 인격살해를 일삼고, 세계선교에 비전대신 흙탕물을 끼얹는 좌경화된 기독교 원수들이 독버섯처럼 곳곳에 도사리고 있음을 통탄하지 않을 수가 없는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면에서 기독교 사이비 이단연구기관에 몸담아 있는 목회자들은 아래와 같은 객관성 있는 경고에 대해서 정직하고 성실하게 반드시 귀를 기울일 중요한 요인이 된다고 믿는 바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한국교회와 이민교회 안에 영혼구원(전도)하는 일에 정체현상을 일으키게 하는 반기독교의 확산과 사단의 교묘한 전략에 휘말리는 이단정죄 풍조가 속히 사라져서, 영적인 무기력과 붕괴(collapse)현상에서 일어나 적극적인 진리의 변증자들이 되도록 도전하기 위하여 아래와 같은 경고의 글을 올리고자 합니다. 여기에는 이미 언론을 통해 건전한 생각과 의견들을 제시한 분들의 글을 참고했고, 또한 이단대책에 관한 자료들과 본인의 생각을 종합적으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미주에서 태동된 사이비 이단대책위원회도 새로운 것은 없다

한국에서도 이미 이와 같은 사이비 이단대책 및 척결 기관들이 한 손에 권력을 쥐고, 한 손엔 언론을 장악하여 한국교회에 대해서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갖가지 횡포와 협박, 정치적 압력 등을 일삼아 자신들의 소정의 목적을 쟁취한 사례들이 일반화되어 폭로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피로 값 주고 사신 그리스도의 교회에 피해를 관망만 할 수 없어 소위 “이단연구”라는 책 후편이 될 만한 “이단사냥꾼(감별사)의 속성”이라는 흥미 있는 책까지 한국에서는 출간되어 읽혀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한국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미주에서도 그대로 복사가 됩니다.  좋은 일들은 전파되는 속도가 느리고, 나쁜 일들은 미주에 상륙하는 시간이 그렇게 길지 않습니다.  
 
잘해나가던 뉴욕교협의 사이비 이단대책위원회가 이단에 대한 대책을 자체적으로 잘 수행해나갔는데, 마치 중병에 걸려있던 남 왕국 유다의 히스기야 왕이 반()앗수르 동맹을 강화할 외교적 목적으로 예물공세와 메시지를 보내온 바빌로니아 왕의 사신에게 왕궁의 보물고와 군사시설, 그리고 창고의 모든 것을 보여줌으로서 경제력과 군사력을 과시하여 자신을 좀 위대한 왕으로 증명해보려고 했던 것처럼, 결국은 자신을 과시하고 증명하려는 유혹에 빠져 하나님의 나라와는 전혀 상관없는 부패된 시궁창으로 쉽게 빠져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자칭 국제적 조직이라고 하는 세이총과 손을 잡고, 세력구축 기반을 거짓과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았으며, 이슬람 선교를 중심으로 30년 이상 중동지역을 대상해서 사역하고 있는 선교단체 인터콥과 최 바울 목사에 대한 신학사상을 문제 삼아, 사역 자체(비전스쿨)를 방해 또는 공갈협박으로 금지시키며, 개인적인 인신공격을 넘어서 흠집을 내고, 아예 끌어내리려고 결사적으로 총집중하여 큰 물고기 사냥에 열을 올리는 것은 마치 마피아조직 같은 느낌을 들도록 하기에 충분합니다.  

결국은 조직의 힘을 연대해서 이단 사냥꾼 역할을 하겠다는 속셈인데, 이 조직에 아무 영문도 모르고 이단척결에 대한 조직이니까 적어도 여기에 소속이 된다면 이단소리는 안 듣겠지? 안도의 숨과 함께 조직 명단에 이름이 자의반 타의반 올라간 목회자들도 있고, 객관적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인물들이 대부분 나열되어 있습니다.  물론 세이총의 말을 빌린다면 “조직의 정비”가 불가피한 유명무실(有名無實)한 조직력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마치 시리아 정부군이 민간정부군과 싸움을 하기 위해 막대한 돈을 주고 외국인 군대를 모집하는 것과 같은 “세이총” 또는 “진목연”이라는 조직을 보면서 목회자들이 너무 할 일이 없고, 한심스럽다는 생각이 떠나지를 않습니다.          

유령처럼 나타난 이 조직과 이단 사이비대책이라는 기관의 활동 목적은 그동안 문제시했던 IHOP의 신사도 운동과 일반적으로 이미 오래 전에 사장(死藏)되어 모든 성도들이 대부분 익히 알고 있는 김 기동 씨의 베뢰아 귀신론을 폭넓게 적용하여 중동 이슬람권 선교사역의 전문가인 최 바울 목사와 인터콥을 이단시 하고, 여기에 관련된 정치적 이득에 걸림돌이 되는 특정인들을 정치판에서 한번 꺾어보겠다는 것이 조직 활동의 대 사명이요, 조직의 목적이라고 공공연히 그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는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과 영적인 불모지에 선교하는 일에 열심을 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목회하는 목회 현장은 쑥대밭이 된 채로 방치해 놓고, 이단 사냥꾼으로 역사적인 소명을 받아 남을 정죄하고, 전 세계의 교회들을 실시간 감시하는 체제로 그 조직이 결정하는 이단성과 사이비 집단들을 무력으로 심판하려는 듯이 용맹을 떨치며, 뉴욕과 동부지역을 강타해 보려고 시도했던  유령단체들이 뉴욕의 이단 사이비대책기관과 불행한 운명의 손을 잡고, 출범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들의 목적은 사실, 인터콥의 최 바울 선교사뿐만이 아니라 할 수만 있으면 더 많은 사람과 단체들을 이단시하여 업적의 목록에 기록하고, 그것을 직업적인 빌미로 삼아 경제적 이득과 세속적인 명예를 챙기고자 하는 최초 인류의 시조 아담의 속성과 같은 유혹을 떨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심지어는 세계 최대 선교단체인 국제예수전도단(YWAM)도 이단으로 몰아가는 것을 보면, 정말 바리새적인 이단사냥꾼(이단감별사)들이 강박적인 싸이코패스의 병적인 인격살해 속성을 가지고 안티기독교 역할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한국 예수전도단은 1961년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에 파송 받은 오대원(David E. Ross) 선교사 부부에 의해 창설되어 한국 복음화와 젊은이 사역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국제적인 선교단체입니다.

매우 우려가 되는 것은, 왜 이렇게 짧은 기간에 기독교 사이비 이단연구 및 대책 기관들이 언론에 굉장한 단체처럼 위장을 하고, 위협을 하고 있는지?
 이는 그 사역의 동기와 결과에 있어서 기독교 복음전파에 역행하는 매우 불순한 동기로서의 신앙적 좌경화로 그 길을 자처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단순히 신학사상이나 교리적인 측면에서 바른 교회를 지향하는 순수한 동기 보다는 정치적인 불순한 동기가 뒤에 도살이고 있음을 미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들은 바른 교회를 한 번도 목회해 본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들입니다.  목회자로서 목회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면 하루아침에 정치목사로 전락되기 쉽습니다.
 
본론

1.
세이총이나 진목연 조직이 결정하는 이단판정 기준은 설득력이 없다

어떤 교회나 단체가운데 인간이 공공연하게 교주(자칭 하나님)의 위치에 군림해  있으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사람이 탈취한다든지?  아니면 가르치는 교리나 신학사상이 복음에 역행하거나, 잘못된 신앙관으로 기독교인으로서의 삶이 황폐해지든지, 행실이 선하지 않든지? 라면 몰라도 이단사이비 정죄판결을 밥 먹듯이 가볍게 하는 행위는, 자신들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를 정치적이고 물리적으로 힘을 과시하려는 것이고, 자신들에게 이단사이비를 재판할 수 있는 꽤나 괜찮은 실력자들 또는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애써서 증명하고 싶은 충동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이단 기준에 대한 판단은 객관적으로 설득력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초교파적으로 조직된 이단대책위원회는 이미 공인된 공회 기관인 소속교단에서 사이비 이단으로 정죄 받은 집단들에 대하여 대책을 세우고, 교인들을 그 이단으로부터 보호하며, 이단에 대한 연구나 추적은 하되 그 자료를 소속교단으로 넘기면 교단 차원에서 신중한 조사가 이루어지게 되겠지요.  왜 공회에서 이런 결정적인 이단문제가 다루어져야 하는가 하면, 그 교단 상회 기관이 그 교단에 소속된 교회나 사람들을 누구보다 더 잘 알기 때문이고, 소속 교단마다 신학적인 특성들이 조금씩 다르며, 신학적 표현들이 교단마다 다르다는 것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단이다” “이단이 아니다”하는 판단은 공회에서 다루는 문제이지 사이비 이단대책위원회가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역할이 뒤바뀌어지면 그야말로 사이비 이단대책위원회가 사이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공회재판에 의해서 이단 여부가 결정되는 것이지, 중구남방으로 오합지졸이 모여서, 그만한 실력을 갖추었는지? 검증도 되지 않은 사람들이, 그것도 몇 사람이 작명된 이단대책 조직이라는 이름 하나 가지고, 발표된 유일한 성명서 한 장으로 이단이 되고 안 되고 하는 것은 아이들 장난하는 것 같고, 병정놀이를 하는 것 같아서 상식적으로 받아드릴 수가 없습니다.  대부분 신학을 제대로 배웠고, 기본실력을 갖추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겸손한 목회자들은 이단대책 조직의 활동에 대해서 소극적으로 관망하는 분위기일 따름입니다.  더욱이 세이총의 이단 판결의 정신과 방향에 대한 아래의 7가지 발표문은 탁상공론이고, 이론은 그럴싸한데, 그렇게 실천하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으니 마음이 아픕니다.

  a. 교회는 이단의 영혼을 치유하는데 역점을 두어야 한다(하나님 나라 확장이나 영혼구원에 대한 열망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다).
  b. 이단 사이비 집단으로부터 변호할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보장해야 한다(기독교신앙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과 신학적 사고가 짧으면 독선적이고 일방통행이다).
  c. 이단 판정위원들은 도덕적, 윤리적으로 존경을 받아야 한다(이단 사이비 대책과 관련된 인물들이 목사로서의 학문적인 소양과 인품과 신앙양심, 도덕성과 윤리의식이 전혀 나타나 보이지를 않는다).
  d. 이단 판정을 해제할 수 있는 상설기구를 만들어야 한다(소속된 기관이나 교단에서 더 잘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데, 상설기구를 고등법원처럼 만들어 놓고, 또 다시 정치적인 이득과 세속적인 권세를 누리려고 하는가?).
  e. 이단 판결에서 정치적인 세력(돈과도 관련)의 개입은 제거되어야 한다(30년의 이슬람 연구 및 전문적인 노하우와 650명의 선교사가 활동하고 있는 인터콥과 같은 유일한 선교단체를 자체적으로 연구해 보지도 않고, 인터넷 성명서나 종이 몇 장으로 무리하게 상대를 매몰시키고자 하는 만용을 보면 정치적인 이득을 노리려는 속셈으로 볼 수밖에 없다).
  f. 이단 판결은 성경의 가르침을 기준으로 이루어져야 한다(언론에만 의존할 뿐, 건전한 신학적 사고와 성경지식을 가지고 이단 대처를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g. 이단 규정과 해제는 공의회에서 결정해야 한다(당사자들은 공의회의 위임이나 지도를 전혀 받지 않고, 이단 사이비종교 척결 활동을 불법적으로 벌이고 있다).  
       
2.
사이비 이단연구 전문가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뉴욕 교협산하 이단 대책위위원에서 이단 세미나를 개최하기 위하여 이단 전문 강사를 초청하는 것 같은데, 사실은 사이비 이단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전문적인 학문은 없습니다.  그냥 비교종교학 정도이지 이단을 연구하는 학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단을 연구하기 보다는 바른 진리를 연구하고, 성경을 연구합니다.  바른 신학의 기초를 닦기 위해 교의학(Systematic Theology)을 잘 공부해 놓으면 이단은 자연적으로 분별이 되고, 진리가 아닌 것을 가려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사이비 이단전문가는 따로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단을 연구하고 묵상하다보면 자신이 이단에 빠질 확률이 많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단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면 나올수록 신앙생활에서 불이익을 가져옵니다.  마치 김 기동씨의 베뢰아 귀신론이 보통 감기만 들려도 귀신과 관련되었다고 하니까 자연적으로 귀신을 많이 묵상하게 되지요.  그렇게 되면 귀신이 평생 동안 그를 괴롭힐 가능성이 많아집니다.  왜냐하면 전능하시고 구원의 언약에 신실하신 좋으신 하나님을 많이 묵상해야지, 사탄의 졸개들을 묵상하면 흑암의 권세 아래서 늘 불안하고 고통을 당하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교인들에게도 강단에서 이단에 대한 설교와 이단에 대한 공부를 1년 이상 집중적으로 계속 한다면. 성도의 삶에서 구원의 즐거움이나 영광스러운 복음전파와 선교하는 사명을 상실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단사상은 상대적으로 쉽게 알 수 있습니다(좋은 것으로 충만하게 채워 놓으면 나쁜 것이 무엇인지?).

그래서 교회 성도들도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잘 훈련되면 이단에 대해 가르치지 않아도 진리의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바른 진리를 깨닫게 해주시고, 지혜의 성령께서 이단 사상을 판단할 수 있도록 분별력을 주십니다.
 만일 이단 전문가라고 하면서 성경말씀과 기초신학에 충실하지 않았다면 자신도 모르게 분별력이 없어 스스로 이단 사상에 빠질 우려가 높습니다.  자신의 허약한 신학과 교리의 잣대로 대부분의 사람들을 이단으로 정죄해 놓으면 더 많은 다수가 이단 사상에 물들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사이비 이단대책 사역은 떠벌리며 흥분해서 대처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은밀하게 전략을 세우고 지혜롭고 슬기롭게 대처해야 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복음으로 충만해야 하고,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과 미혹의 영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더더욱 영적으로 민감해야 합니다.  생명의 말씀과 은밀한 기도의 골방이 누구보다 더 확고해야 합니다.  사단의 술책이 얼마나 지능적이고, 교활한지도 잘 알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진리로 충만하면 비진리가 무엇인지? 이단이 어떤 집단인지를 어렵지 않게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특정한 이단연구 전문가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치 누구든지 전기밥솥만 있으면 전기 플러그를 사용하여 맛있는 밥을 잘 지을 수가 있는 것과 일반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단을 판별할 수 있는 영적인 지각이 진리의 영으로 말미암아 열려있습니다.    

3.
기독교 이단연구 및 대책 협의회가 정말 인기 있고 권세 있는 기관인가?

기독교 이단척결에 대한 기관들을 살펴보면 그 명칭 사용이 대략 서너 가지로 압축됩니다.  기독교 이단을 연구하는 학회 기관과, 이단대책을 마련하고 이단 척결을 실질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전략을 세우며, 논의하는 협회나 위원회가 있습니다.  또한 이단문제를 상담해 주는 상담소와 상담소 협의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이 이단을 척결하는 일에 있어서는 기독교 공의회나 개인과 단체기관에서 이단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 인력도 필요하고, 정확한 자료와 정보를 가지고, 전략과 함께 대책을 마련하여 실제로 행동으로 대처해 나가는 일이 필요하겠습니다.

기독교 이단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라 초대교회나 중세 기독교 교회사에도 각종 이단들이 끊임없이 있어왔습니다.
 농부가 좋은 씨앗을 뿌렸는데 나중에 보면 가라지도 함께 자라는 것처럼, 복음의 씨앗을 뿌리면 악한 사탄이 가라지도 뿌리게 되어 있습니다.  대략적으로 한국 기독교 초창기부터 기독교를 흉내 낸 국내의 교주(자칭 하나님)들을 대상으로 이단척결운동이 시작되었으며, 한국교회에서 이단척결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것은 복음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던 1980년대부터입니다. 그 동기는 피로 값 주고 사신 그리스도의 교회와 성도들을 진리의 말씀으로 보호하고, 위장된 거짓 교회를 폭로함으로써 성도들을 이단 사이비 집단으로부터 미혹당하지 않게 하며, 교회가 영적인 분별력을 갖고 지상에서의 복음의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기독교 이단척결을 위해 공회가 아닌 개인적인 자격으로 한국교회에 공헌했던 시대적 인물들이 있는데, 아래의 세분을 열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 이단척결운동에 평생을 바쳐 큰 업적을 세웠던 국제(한국)종교문제연구소 소장 고() 탁 명환교수는  개인 연구소를 만들어 이단척결을 위해 피를 흘리기까지 모든 위험을 무릎 쓰고 당시 무서운 교주들을 상대로 싸웠던 기독교 이단척결의 대가였습니다.  그는 결국 사이비종교집단 신도들에 의해 수십 차례 테러를 당해오다가 지난 1994 2월 괴한(임홍천)에 의해 피습당해 57세의 나이로 순교자의 삶을 마감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물론 고인이 되신 탁 명환 교수에게도 사사로운 시비 거리와 부정적 이미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의 죽음은 한국기독교 역사에 길이 기념될소중한 희생이며, 순교적 사명을 다했다는데 큰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교수직에 봉직하면서 각종 비교종교학 강연을 통해 학문적으로, 때로는 행동으로 담대히 이단 교주들의 거짓 사상에 맞서 싸웠던 신 사훈 박사도 훌륭한 당대의 이단 척결 운동가였다고 사료(思料)됩니다.  그리고 구원파 집단(권신찬과 유병언 사장)에 빠졌다가 구사일생으로 빠져나와 구원파의 허구성을 낱낱이 폭로해 준 대전침신대학 정 동섭 교수도 자신의 저술과 강연, 그리고 산 간증을 통해 한국기독교 이단과 사이비척결에 크게 공헌한 훌륭한 분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이단척결 운동에 대한 특별한 소명의식은 탁 명환 교수의 순교의 피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하는 긍정적인 면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와는 달리 극히 정치적인 불순한 동기와 인간적인 열정, 그리고 자기 의()와 자기 증명(證明)에 심취된 나머지 기독교 이단 감별사로서의 갑작스런 출현은 단순히 긍정적인 면에서만 평가할 수는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소위 사이비 이단종교 척결운동에 대한 불타는 사명감이 명분에 불과할 뿐, 사명보다는 자리를 탐하는 정치놀음과 비윤리적 행동(돈과 공명심, 인격살해)도 서슴없이 행하는 파렴치한 부정적 결과를 절대 간과할 수 없는 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사이비 이단 척결운동의 현주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단과 사이비집단을 개혁주의 신학과 복음주의 신앙, 문화적 측면과 선교학적 관점, 실천신학적인 관점과 목회적인 윤리와 도덕성, 신앙인격과 지도자의 자질 면에서 폭넓게 분별하고 판단할 수 있는 종합적인 학문성과 영적 분별력이 준비되어 있는가? 하는 것도 매우 의심해야할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방적으로 행해지는 이단 감별 기준이 오직 성경에 의해 옳고 그름이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기준’이 되고, ‘교단과 각자의 교리’와 ‘주관적인 신학사상’과 ‘정치적인 속셈과 계산’, 그리고 ‘개인적인 영예와 이득’이 기준이 되어 ‘정통과 이단’을 분별한다는 것은 참으로 불행스럽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각종 기독교 이단사상과 사이비 종교가 판을 치며, 전도의 문이 점점 좁아지는 시점에서 이단감별을 하는 사명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신중하고, 조용하며, 은밀하고 지혜롭게 이루어져야할 일이지?
 권세와 위력을 과시하며, 일부 언론사의 반기독교적인 기사를 근거자료로 하여 거짓과 술수와 오만함으로 기독교인들의 낯을 뜨겁게 만드는 것은 분명히 옳은 자세가 아니라고 봅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학문의 극치요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신학(Theology)의 학문적인 소양과 신앙 양심도 없이, 기독교 복음의 핵심인 십자가와 부활도 믿지 않고, 선교에 대한 불씨도 그 속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직업적인 일부 신학자들의 편향된 조잡한 글을 인용하여 이단과 사이비 집단을 척결하겠다고 하는 그 자체가 얼마나 스스로 허약성을 드러내고 있는 행위인지 안타깝기만 합니다.  

언론에 이미 공개된 글들이라서 자신들이 스스로 반기독교인(Anti Christian)이요, 반기독교(Anti Christianity), 반교회(Anti Church)단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지만, 30년 이상 마지막 복음의 불모지인 이슬람선교에 기반을 닦아놓은  선교단체를 골리앗으로 비유하여 궁극적으로 그 단체를 무너뜨리는 목적이 이단 사이비 대책 집단들의 전략이라면 뉴욕과 뉴저지 어느 곳에서 이단 세미나를 개최한다 해도 관심이 점점 식어질 것이요, 그 사이에 틈을 타서 진짜 이단들이 뉴욕 뉴저지에서 자유롭게 활개를 치는 진풍경이 불원간 도래할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악명 높기로 유명했던 북 왕국 이스라엘의 아합왕과 그의 부인 이세벨처럼 분별없는 열정이나 이기적인 야망과 결합된 잘못된 열심은 오히려 이단과 사이비 집단들에게 도움을 주는 우스꽝스러운 결과를 낳게 될 것이며, 사실 이단 사이비 척결을 빙자한 언론 매체의 반기독교적인 Anti 역할과 세속적인 힘겨루기와 이단 사이비대책 기관들의 연대의식에 대해 그들은 코웃음을 치고 있을 것입니다.  진리는 절대적인 가치가 있기 때문에 공회에서 “법이요”라는 말과 동일합니다.  진리가 아니면 아무리 세력을 과시하고 연대해도 수호할 수가 없는 물거품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어떤 개인이 고독하게 싸울지라도 반드시 이기게 되어있습니다.  목회자들이 연대해서 물리적인 힘과 기()싸움으로 진리를 수호하겠다는 것은 너무나 유치하고 허약한 행동이며, 그것 또한 예수님의 방법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이단사상과 사이비종교집단이 발생하는 원인도 사실은 우리 모두가 부끄러워해야 될 사안들입니다.  지나간 역사를 돌이켜보면 사회적, 국가적, 범세계적으로 시대가 혼란하고 혼탁할 때에 여러 신흥종교와 집단이 생겨났고, 신흥교주가 출현하여 민심을 동요케 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더욱 분명한 사실은 부끄럽게도 이단사이비종교집단이 기성교회의 제도적 부패와 타락, 성경해석의 오류, 자유주의 신학과 변질된 신앙사상, 교회와 교인들의 무사안일주의, 이탈된 믿음생활로 인한 혼란을 틈타 유리방황하는 과정에서 기인하여 발생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단과 사이비에 대한 정죄의 마음보다 그들에 대한 긍휼한 마음이 앞서야하고, 이단으로 분류해서 사냥하고 죽이려는 목적보다 이단성 있는 사람들을 구해내는데 그 역점을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이단감별을 하다가 오히려 자신이 이단의 도마 위에 오르는 이단 사이비 전문인도 있고, 기독교 이단감별사로서 윤리 도덕적인 그물에 걸려 자신 스스로가 정죄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너무나 비일비재한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그렇기 때문에 적극적인 기독교 진리의 대변자로 굳게 서지 못하면 잔인한 이단 사냥꾼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남을 판단하기 전에 자신을 부단히 성찰하여 끊임없이 배움의 자리에 있지 않고 이탈하면, 하나님의 가족 안에서 형제가 형제를 살해하는 카인과 아벨의 사건을 재현할 수도 있다는 것을 경고하고 싶습니다.  실제로 보도된 의처증 환자에 대한 사건이지만, 부인과 함께 자고 있는 자가 외간 남자인줄 알고 어둠속에서 살해했는데, 알고 보니 처제(아내의 여동생)였다면 당신은 이 억울함과 비통함, 그리고 그 죄 값을 어떻게 얼마나 치러야 되는지? 를 깊이 생각이라도 해 보셨습니까?  기독교 이단과 사이비종교는 이미 그 기준이 충분히 자료로 공개되어 있고, 구태여 연구를 하지 않아도 금방 분별할 수 있는 우리 몸 안에 이물질(異物質)과 같은 분명히 다른 것이지, 애쓰고 연구해서 마치 종교 마피아적인 기관이나 조직이 언론에서 힘의 논리로 이단이라고 밀어붙이면 즉시, 이단제품이 만들어지는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이단 사이비대처는 연대해서 힘을 과시하거나 자랑거리로 삼고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대중들의 심리전을 이용하여, 권세를 남용하며 협박 내지는 특정 개인을 흠집 내고 인격살해를 하는 추악한 기관으로 전락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사실 을 인식해야만 합니다.  자신부터가 소속교단이나 기관단체에 충실하고, 혹시 개인적으로 타인에게서 이단감별이 감지되면 소속 교단을 통해 공회가 상대에게 질의서를 보내거나 진척이 없으면 해당 소속 공회에 질의서를 보내어 시정을 요구하거나 조사를 의뢰하는 지혜로운 방법으로 이단 대처를 은밀하게 해 나가야지 떠벌리면 실수도 많고, 법정공방으로 소모적인 피해를 입게도 되며, 언론에 또한 부정적인 기독교 이미지로 부각되어 세상이 온통 이단교회들로 가득하다는 인상을 심어주게 되므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가는 지상과제에 전략상 구멍이 뚫리게 될 것이니, 그렇게 되면 과연 그 피 끓는 열정이 누구를 위함이며, 누구에게 무슨 이익이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4.
기독교 이단 사이비종교 척결운동을 위한 올바른 정신과 자세는 무엇인가?

한국 기독교역사는 복음이 처음 들어올 때부터 선교사들의 순교의 피가 흠뻑 젖은 피의 역사였습니다.  지금도 앞서간 신앙의 선배들의 순교자적 사명 따라 복음의 진리를 위해 희생하겠다는 결사적인 정신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한국교회의 역사는 세계 열방을 향하여 복음의 빚진 자로서의 사명을 향해 끊임없이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를 위해 숭고한 피를 흘렸던 순교자들의 피가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진리 수호에 대한 올바른 자세와 전략적인 지혜를 모아야 합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1:6).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기독교 이단과 사이비종교를 척결하는 올바른 자세일까요?    

어떻게 하는 것이 이단을 척결하는 바른 자세이며, 과연 무엇이 문제입니까?  아무런 기독교 이단 판단기준도 없이 사소하고 미미하며, 흠집용 신학사상 문제나 인간이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 없는 개인의 신앙적 체험, 정치적인 감정, 그리고 선교현장의 문화적인 이해와 성경해석과 적용에 관한 차이점까지 모두 이단이라고 치부해 버린다면 사실 이단성이 없는 개인이나 교회, 기독교 기관이 세상 어디에 존재하겠는가? 라고 반문하고 싶습니다.  이단은 몸 안에 들어와서는 안 될 암세포요, 이물질(異物質)입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처럼 뉴욕에 초청되는 한국의 무수한 강사들을 너무나 쉽게 주관적으로 판단하고 정죄하며, 삐뚤어진 사고방식을 가지고 재판관의 위치에서 남을 무너뜨림으로 쾌감을 느끼려고 하는 병적인 작태를 교계의 분위기를 보아서라도 이젠 중단해야할 시점에 온 것입니다.  실제로 깊이 알고 보면 이단 사이비를 척결하겠다는 장본인들의 학문적 소양과 신학적인 사고력이 어느 정도 기준에는 도달해 있어야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매우 안타깝습니다.  그 증거로서 적어도 비교 종교학 강의나 무엇이 이단 사이비 집단인지? 에 대한 강의를 직접 할 수 있는 수준에 있지 않고,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강사를 데려와 세미나를 열거나 일부 언론사의 검증되지 못한 기사를 근거자료로 이단 판정을 결의하며, 불의하고 좌경화된 자칭 기독교 언론과 결탁하여 무가치한 싸구려 논쟁으로 교계를 매우 혼탁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뿐만 아니라 “세이총”이니 “진목연”이니 단체 이름만 다를 뿐 동일한 몇몇 인물들이 거짓과 권모술수, 날조된 비방과 공명심을 발휘하여 세속적 정치 연대를 도모하며, 결과적으로 반기독교적인 활동으로 전도의 문을 막고, 선교의 열정에 찬물을 끼얹으며, 오히려 이단 사이비 집단의 발 빠른 서식을 적극적으로 안전하게 방치해 주는 도우미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체계를 세우고, 전도의 문을 여는데 치명적인 문제가 없으며, 영혼 구원하는 일에 피해가 되지 않는다면, 함부로 주 안에서의 형제나 신앙가족에 대해 이단 정죄를 하거나 사역을 적극 지원하지 못할망정 방해를 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너무 자주 이단성을 거론하거나 일반적인 생각과 견해를 특별한 사건인양 문제를 제기한다면 진작 특별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는 그 사건에 대해서 믿는 자들조차 무관심하게 될 것이고, 무감각하게 반응할 것입니다.  시시 때때로 돌출하는 시한부  종말론자들 때문에 진작 가져야 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신앙이 우리에게서 점점 식어진 것처럼, 이단 대처 방안이 매우 중요하긴 하지만 너무나 그 대상이 일반화되고 보편성을 갖게 된다면 이단 사이비에 대한 관심과 경각심이 결국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때로는 신학적 전문성이 없는 사람들이 전문적인 신학적 깊은 사고력과 지식이 없어서 잘못된 편견을 갖고 함부로 이단정죄에 열을 올리는 경우도 있고, 선교 현장(mission field)의 몰이해로 인하여 최전선에서 뛰고 있는 현장 선교사들을 실제로 힘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일들도 비일비재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 확장과 영혼 구원하는 일이 어떤 개인이나 어떤 교회에 국한되어 실효성을 거두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과 동역하는 유기적이고도 총체적인 합동작전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각각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먼저 전도대상이나 지역을 정해놓고 기도하는 사람,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불모지에서 최전선의 철의 장막을 뚫고, 어두움의 영들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가장 취약한 최전선 위험한 지역에 파견된 현지 선교사들, 말씀으로 복음의 씨를 뿌리는 사람, 양육하고 보양하는 사람, 보살피는 사람 등등 역할이 다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위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하나님 나라 확장사역은 총체적인 Networking으로 서로 존중하며, 상호 협력하는 가운데서 우리는 궁극적인 열매를 기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최근에 활동하는 몇몇 이단 연구회나 이단 대책 위원회는 과연 그 조직이 그리스도의 교회와 성도들을 진리의 말씀으로 보호하고, 진리를 수호하는 연대적 책임을 다하고 있는지?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 피를 흘리기까지 선한 싸움을 싸우고 있는지?  아니면 오히려 예수님의 가르침에 역행했던 바리새인들과 주후 1세기에 교회를 박해했던 사울과 같은 행위를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당시 유대인들도 예수님을 이단으로 척결하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면에서 우후죽순처럼 다양하게 발생하고 있는 이단 사이비대책 위원들이나 이단 연구회에 몸담고 있는 분들은 이제라도 심각성을 가지고, 의미 있는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이단 사이비를 척결하겠다고 호헌장담하며, 비겁하고 유치한 신학 논쟁과 이단 사냥꾼의 마녀사냥을 하고 있는 동안에 오히려 무서운 기독교 이단이요 사이비인 신천지 집단들이 뉴욕에만도 300명이 서식하고 있었으니 얼마나 한심한 일인지 모릅니다.
 지금도 162St. & 45Ave.에 위치한 신천지 집단의 활동이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버젓이 맹활약하며 전통교회 교인들을 미혹하여 끌어가고 있습니다.  N교회의 경우 교회 내부의 혼란을 틈타서 아예 집중적으로 그곳이 신천지 아지트가 되어가고 있는데도, 진작 싸워야할 대상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엉뚱한 곳을 이단성 대상으로 지목하고 신선놀음을 하고 있으니, 이대로 나간다면 이단 사이비 포교활동에 간접적으로 일조하고 있는  좌경화된 기독교 이단 대책 단체들은 후일에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고, 이에 못지않게 기독교 언론으로서 공범에 가담하여 이를 지원한 사이비 기독교 인터넷 사이트도 뉴욕과 뉴저지 인근 교계의 불신임을 받아 자멸할 것임을 또한 미리 경고하는 바입니다.
             
5.
좌경화된 이단연구 대책기관의 인터콥에 대한 구체적인 문제점

1)
선교단체인 인터콥과 최 바울 선교사를 이단(異端)이 아닌 “이단성(異端性)이 짙은 단체”라고 애를 쓰면서 음해 공작하는 이유를 충분히 이해는 합니다.  이단이라고 해서 떠들어대 봐야 신실하고 의식 있는 목회자들은 아무도 호응할 사람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선적으로 최 바울 선교사의 책 내용에서도 이단에 관한한 확실한 증거가 없고, 최 바울 선교사의 신앙인격이나 사역의 열매가 더 이상 상종하지 못할 정도로 추악하거나 교주 냄새가 전혀 나지를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한국교회와 신학자들 가운데 많은 분들이 최 바울 선교사를 잘 알고 있고, 오히려 정치적으로 음해 공작하는 무리들 보다는 적어도 훨씬 신앙인품이나 도덕성이 탁월하고, 선교의 열정이나 사역, 기본적인 신학사상이 매우 건전할 뿐만 아니라 젊은이들과 지성인들에게 다가가기에 적합한 지도자임이 점점 증명이 되고 있습니다.  인터콥과 최 바울 선교사의 이단성은 현재도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신실성과 정직성 때문입니다.

2)
그래서 시비를 걸고넘어지는 것이 신학사상(神學思想)문제입니다. 그것은 이원론 사상이니, 세대주의니, 베뢰아 귀신론이니, IHOP의 신사도 운동 등등에서 조금이라도 닮은 불건전한 신학사상과 공통분모를 애써 찾아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다윈(Charles Darwin)의 진화론을 주장하는 이론과도 같습니다.  만일 최 바울 선교사에게서 위에 나열한 대로 각종 불건전한 이단성과 신학사상이 조금이라도 발견되어 모두 족집게처럼 찾아내는 일에 성공했다면, 그것은 이단을 만들기 위해 가능성 있는 이론에 최대한 집착한 것이지, 정확하게 이단의 뿌리를 알고 그 사실을 발견했다고 단정하기에는 서투른 작업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마치 “인간의 조상은 원숭이다.”라는 가설적인 전제 속에서 원숭이가 인간으로 진화한 과정을 상상의 날개를 펴고, 모든 원숭이로부터 인간과 비슷한 공통된 모습을 찾아내려는 노력과 같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위의 2)번에서 나열한 불건전한 신학사상은 일반 성도들도 대개는 신학적인 용어에 익숙해 있지 않을 뿐이지, 다 알고 있는 신학사상입니다. 그래서 일반 교인들도 극단적으로 육체나 물질은 악하고, 영이나 비 물질은 선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과 구원의 계획을 인간의 역사와 시간과 공간속에 가두어 놓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마귀와 그의 졸개들(귀신)이 시도 때도 없이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찾아와 질병으로 사고로 폐망으로 생각과 지각을 혼미케 한다고 믿지 않습니다.  사단과 귀신들 보다 더 능하신 야훼 하나님이 절대 주권을 갖고 선한목자로서 우리를 매순간 인도하고 있음을 확실히 믿고 있습니다.

4)
또한 오늘날에는 구약의 제사장이나 선지자, 야곱의 12아들(12지파), 신약에서의 예수님의 12제자들(사도들)과 같은 특정인물이 존재하고 있지 않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단지 제사장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섬기고, 봉사하며, 예배를 드리고,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고, 예언자나 선지자의 정신을 가지고 사역을 한다는 것이며, 사도의 정신을 이어받아서 위임받은 그리스도의 복음사역을 영광스럽게 수행해 간다는 것으로 대부분의 성도들이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평신도들도 이 정도는 대부분 알고 있는 너무나 상식적인 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것도 상대적으로 그 수준을 점검해 볼 필요성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견해도 들어보려고 하지 않고, 실제로 본인들도 그러한 용어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이단성 운운하는 것은 흠집을 내려는 목적에 불과하지 선한 의도가 전혀 없다는 것이 증거가 됩니다.      

5)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와 다른 신학적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너무 쉽게 정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기의 신학과 다르면 모두 '사탄의 종'이고 '적 그리스도'이고 '거짓 선지자'이고 '이단'이라고 합니다. 양식 있는 학자라면 그런 극단적이고 과격한 언사는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세대주의에 대해 그러한 식으로 매도를 해왔습니다.  그런 논리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달라스 신학교나 탈봇 신학교는 세대주의 신학교이기 때문에 모두 이단이나 사이비집단이며, 스윈돌(Charles Swindoll), 맥아더(John MacArthur, Jr.), 위어스비(Warren Wiersbe), 크리스웰(W.A. Criswell)등도 모두 이단이거나 사이비이고, 따라서 그런 사람들의 책을 출판하거나 읽는 일도 절대 없어야 할 것이다.

세대주의를 매도하거나 정죄하는 사람들의 세대주의 이해는 실제 세대주의자들의 견해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고, 어떤 경우에는 과연 그들이 세대주의가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고서 그런 말을 하는지, 아니면 간접적으로 남에게 들은 지식에 근거해 그런 말을 하는지 의문이 갈 때도 많이 있습니다.
 세대주의자들의 문제는 5%에 불과합니다.

계약신학자들도 세대주의자들에 대해서 마찬가지로 불평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계약신학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 비판만 한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언제나 견해가 다른 신학을 바르게 이해하려고 먼저 시도한 뒤에, 그 신학이 갖는 장점과 문제점을 언급해야만 합니다. 세대주의와 계약신학과의 관계는 이단 대 정통신학의 관계가 아니라 정통신학 안의 신학적 차이임을 알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보수 신학계에서 상호대립 관계에 있는 두 신학 조류이기 때문에 상대방의 입장을 존중하면서 학문적 관점에서 논의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접근 방법이라고 생각됩니다.

이스라엘에 대해서도 세대주의자들은 너무 지나치게 친() 이스라엘 입장이고, 그 반대자들은 지나치게 반() 이스라엘 입장으로서 무관심 또는 냉소적입니다.
 서로 간에 신학적인 차이로 인하여 양극 현상을 빚은 결과입니다.  그러나 두 신학 조류가다 보수 신학계로서 각기 장점이 더 많지, 단점이 더 우세한 것은 아닙니다.    

6)
사이비 이단분별 기준은 진리의 성경말씀이 표준이 되고, 이미 공회(公會)가 마련한 공식적인 기준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좌경화된 이단 대책기관들은 사이비 이단 분별 기준을 사이비 이단집단들과 불건전한 몇몇 신학사상에 표준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확실한 이단적인 증거를 찾는 것이 아니라 비슷하거나 유사한 것 같아 보이면 모두 이단성이 있는 것으로 판정을 합니다.  왜냐하면 그 기준이 매우 희미하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원판(성경)으로 주물을 구워야지? 이미 나와 있는 물건(현실)을 가지고 복사를 하다보면 결국엔 엉뚱한 결론이 나옵니다.  원숭이를 묵상하다가 사람에게서 원숭이 닮은 것을 찾아내는 경우와 같습니다.  인터콥을 음해 공격하는 사람들에게 “당신들도 원숭이를 닮은 몇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라고 한다면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7)
이단성이 짙은 비전문가들이 신학사상을 다루면 어렴풋이 알고 있는 그 짧은 편협한 신학의 잣대로 사람을 정죄하고, 매장시키고, 인격살해를 하기 쉽지만, 신학의 전문성을 지향하는 사람들은 점진적인 신학발전에 기여할 뿐만 아니라, 성경을 더욱 이해하기 쉽게 드러내고, 하나님 나라 확장과 복음 전파하는 사역을 음으로 양으로 원활하게 학문적으로 지원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른신학은 바른 신앙관을 정립해 주고, 바른신앙은 바른 생활을 하도록 도와줍니다.

8)
신학(神學)이라는 학문은 그 자체만으로는 불완전합니다.
 신학사상이란? 계시된 성경말씀의 범위 안에서 성 삼위 하나님에 대해 점진적으로 알아가는 과정의 학문입니다.  그러므로 신학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을 섬기는 그의 백성들의 삶을 위해서 필요한 정리된 이론인 것입니다.  모든 이론과 학문이 그렇듯이 이론이 먼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이 먼저이지요.  우리를 향하신 구원의 실제의 사건을 옛날에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말씀하셨으나, 이 마지막 날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1-2).  그러므로 구원의 실제의 사건을 기록한 것이 성경말씀입니다.  이것을 다시 후대에 사람이 이론으로 정리한 것이 신학이라는 학문입니다.  사소하고 미미한 신학사상의 차이점을 가지고, 상종 못할 이단성 운운하는 것은 너무나 학문적으로 옹졸한 작태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9)
신학사상과 이단사상은 엄연히 다릅니다.  신학 사상은 교단마다 조금씩 다를 수가 있습니다. 성경의 진리는 변함이 없지만, 신학사상은 해석과 적용의 문제이기 때문에 조금씩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합니다.  그리고 혹 불건전한 신학사상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놓고 확대해서 이단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터콥과 최 바울 선교사의 신학사상이 그렇게 불건전하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더욱이 인터콥 선교회를 이단성이 짙다고 문제 삼고 있는 부류의 사람들도 어떤 신학사상을 가지고 있는지?  그들의 신학적인 학문의 깊이와 내용과 신학적인 색깔을 검증해 볼 필요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두들 자신이 성장해온 신학적 배경에서 다른 사람을 비방하고 비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0)
“이단이다” 또는 “이단이 아니다”가 아닌 “이단성이 짙다”라는 표현은 대부분 정치적인 발언일 뿐입니다.  언제나 자신에게 불리한 위기상황에서는 몸을 피신할 수있어야 하니까 자신 없는 어중간(於中間)한 정치적인 발언을 하는 것입니다.  의미 있는 정치는 사람을 살리는 정치이지만,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정치는 사람을 인격적으로 살해하고야 말지요.  현재 인터콥과 최 바울 선교사를 음해하고 공격하는 집단은 사이비 이단 척결과 진리수호라는 명분 아래 한 개인의 인격을 살해하고, 이 세대에 가장 취약한 중동선교의 밝아오는 여명을 이단 정죄라는 죄악의 손바닥으로 가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번도 중동 이슬람 지역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거나, 그 지역의 땅도 밟아본 경험이 없다면, 그리고 그런 나라에 단기선교 차원에서라도 그 민족을 가슴에 품고, 선교의 현장을 다녀오지 않았다면, 함부로 사악한 입을 열어 전문선교사를 이단성이 있다고 매도할 자격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선교현장을 이해하지 못하면 신학사상도  콩 나라 팥 나라 논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현장을 위해서 신학이 지원되어야합니다.  
     
11)
그렇다면 무엇인가?  단순히 이단성이 있다고 여론화시켜서 여기에 관련된 정치적 이득을 챙기겠다는 계산입니다.  이것은 마치 허리케인이나 토네이도와 같은 이상 기후변화로 오는 자연 재해를 인하여 길가의 모든 차량들이 파괴되기를 바라면서 자동차 산업에 더 많은 매출을 꽤해 보겠다는 성공심리와도 같은 것입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이단 정죄의 끊임없는 의도를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사실은 진리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뉴욕에서 정치적으로 자신들과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는 사람들을 곤욕스럽게 하려고 정치 놀음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이번 기회에 사이비 이단대책이라는 대 명제를 가지고 업적을 올려 정치적인 세력을 구축하기 위한 발판으로 삼기 위한 것입니다.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다면, 이단 만드는 공장 공사판 하나 수주하여 평생 권좌를 누리고, 정치적인 입지를 든든히 하려고 하는데 있습니다.  

12)
중국 본토의 내륙지역 교회들은 영국의 웟치만 니의 심취주의 사상 때문에 신앙의 본질이 훼손되어 심각할 정도로 이러한 사상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물론이고 세계 모든 교회들이 그들을 이단이라고 적대시하며 상종을 거부하지는 않습니다. 신학사상에 관계된 문제라면 우리 뉴욕교계에도 얼마든지 잘못된 사상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학사상에 관계된 문제를 모두 이단이라고 한다면 이단이 주변에 너무나 많아집니다.  예를 든다면 “영성”(靈性)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도 매우 불건전하기 때문에 이단이고, “사도행전의 재현”이라고 해도 이단이고, 일본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의 축사(逐邪) 행위도 모두 “귀신론”에 저촉되기 때문에 다 이단이라고 해야 됩니다.  뿐만 아니라 “솔로몬의 일천번제”를 “일천 마리의 제물”로 해석하지 않고, “일천 번의 제물”로 해석하여 “일천 번의 헌금제도”를 도입하고, 헌금을 제도적으로 강요하는 교회들도 모두 이단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단 정죄에 열을 올리고 있는 장본인들도 불건전한 신학사상에서 아무도 자유롭지 못할 것입니다.  

13)
교회와 선교는 불가분리의 관계인데, 만일 지역교회에서 인터콥 선교헌신자로 작정을 했든지, 또는 지역교회에서 이로 인하여 담임목사에게 물의를 일으켜 미성숙함을 보였든지, 아니면 교회에서 뛰쳐나와 인터콥으로 들어갔다고 가정합시다.  그래서 지역교회가 손해를 입었다면, 그 이유 하나만으로 인터콥과 최 바울 선교사가 교회와의 관계에서 이단으로 정죄될 수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교인 수평이동을 받는 모든 크고 작은 교회들은 다 이단으로 분류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수평이동 때문에 교인들을 대거 흡수한 교회들을 향하여 이단이라고 정죄하지는 않습니다.  교회가 선교의 원동력(Motivation)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망정 선교기관에 의뢰하여 선교 훈련을 받게 하고, 선교 헌신자로 선교지에 단기선교를 한번 다녀오게 하며, 지속적으로 인터콥과 관계를 맺고 선교 비전을 키워나가는 것이 어떻게 이단으로 분리되는 조건이 되는지? 정신이 나간 사람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런 발상을 할 수 있겠습니까?
 
14)
우리는 종종 이런 오류를 범하기 쉽습니다.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너무 영적으로 해석을 하려고 하는 문제입니다.  성경(The Bible)은 그저 고전(古典)에 불과할 뿐, 현실적으로 역사에 아무런 메시지도 적용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또한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구속사적(救贖史的)인 안목이 없이 너무 자의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에만 초점을 두고 해석하려는 오류입니다.  다시 말하면 고대역사 가운데 분명히 인간의 언어로 기록된 성경을 인문과학적인 측면에서 정직하게 연구하려고 하지 않고, 뜬구름을 잡듯이 영해(靈解)하려고 하거나, 현실과 거리가 먼 시공간을 초월한 영적인 세계는 모두 배제하려고 하는 모순된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전적으로 해석하고 적용해야지 일부분을 가지고 전체인양 해석하는 자세는 오히려 이단성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요소가 다분히 있음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15)
“백 투 예루살렘”(Back to Jerusalem)에 관한 용어 사용이 과연 이단성이 있는가? 이러한 용어는 성경신학적(聖經神學的)인 용어이며, 선교신학적(宣敎神學的)인 용어입니다.
 그래서 중동지역의 이슬람 전문선교단체인 인터콥의 선교사 650명뿐만 아니라 모든 대부분의 중동지역 선교사들과 여기에 관련된 국내외를 망라한 선교신학자들, 그리고 중동선교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 많은 목회자들도 “10/40 Window”라는 선교용어와 함께 오늘날 매우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광범위한 선교용어가 되었습니다.  어떤 무식한 신학자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자!(Back to Jerusalem)라는 구호에 대해서 이단성이 있는 용어이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고 있는지 한심할 따름입니다.  

16)
“백 투 예루살렘”이라는 표현은 의미상 단순한 표현은 아닙니다.  여러 가지 함축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용어입니다.  이러한 용어는 종말론적(Eschatological)인 용어이기도 하고, 선교현장(mission field)의 용어이기도 하며, 유대인들도 결국엔 구원받는다는 언약적 개념에서의 선교 전략적인 용어이기도 합니다.  “예루살렘 귀환” “예루살렘에서의 역사의 종결 지점”  “유대인들을 위한 복음의 회복(되돌림)” “예루살렘을 향한 역방향(逆方向) 선교” “선교의 종착지점” “복음의 시작 지점과 땅 끝” “복음의 서진(西進)”과 같은 모든 세대를 망라하여 사용되는 다양성 있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용어의 개념이 시온니즘(Zionism)처럼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가야한다”(예루살렘 귀환)는 것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복음이 마지막 그곳까지 전해진다.” 라는 개념으로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유대민족을 고토로 귀환시키는 일인 “알리야”라는 본래의 뜻도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귀환)라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심”으로 그들의 운명(구원)이 바꾸어지는 것을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열심으로 복음이 그곳에도 전해진다는 말입니다.  

17)
“지금이 예루살렘 시대이다.”라고 외치는 분들도 있지만, 이것도 단순히 세대주의 차원에서 시대를 구분한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인 차원에서 이스라엘에 대해 관심을 갖고, 그동안 무관심하고 편견을 가졌던 유대인들에게도 우리 이방인으로서 열심히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자는 그런 취지가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유대인”이라고 함은 히브리 민족의 야웨 하나님 신앙을 전수해온 정통파 유대인 랍비(Rabbi)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안에 있는 모든 분파를 초월한 그 땅의 민족으로 이해를 한다면 오해의 소지가 없을 것입니다.  물론 정통파 유대인 Rabbi들이 먼저 예수를 믿게 되면 더욱 폭발적인 복음화가 이루어질 것이고, 이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여 변화되면, 아랍권(이슬람)에도 복음이 신속히 확산될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18)
그리고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예언서의 내용이지만,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는 이미 이루어진 부분도 있고, 아직 미래의 사건으로 남아있는 성취되지 않은 종말론적인 부분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역사적으로 성취되어졌지만 또한 점진적으로 성취될 이중적인 언약의 내용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언된 내용들 가운데 시공간을 초월하여 과거에 이미 일어난 성취된 사건이면서도 또한 아직 장래에 될 종말론적인 약속도 남아있다는 예언의 내용인데, 이러한 특징적인 예언서가 곧 에스겔서입니다.  

19)
에스겔은 BC 624년에 사독 계열의 제사장 부시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3; 40:46; 44:15), 그의 나이 30세가 되던 B.C. 594년부터 52세가 되던 B.C. 572년에 이르기 까지 22년에 걸쳐 예언활동을 했습니다.  그는 시공간의 제한 없이 과거, 현재, 미래를 총 망라하여 영원한 현재 속에서 틀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야웨 하나님을 대변하는 파수꾼(경계병)으로서의 직무를 잘 수행했던 충성된 선지자였습니다.  에스겔의 예언서는 포로기간 전후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열방에 대한 다양한 예언, 그리고 종말에 있을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에스겔의 내용 중 전반부는 대체로 이사야(1-39)나 예레미야와 유사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과 그에 따르는 심판과 경고와 회개를 언급하기 때문에( 1-32) 전체적으로 암울한 분위기를 띠고 있지만, 후반부에 가서는 역시 이사야(40-66)나 예레미야와 마찬가지로 거의 대부분 이스라엘의 회복과 하나님의 영광의 귀환에 대하여 다루고 있어서( 33-48) 전체적인 분위기가 밝고 소망적이며, 승리와 기쁨에 찬 분위기를 띠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에스겔서의 핵심은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기대였습니다.  그 이유는 더럽혀진 성전으로부터 하나님의 영광은 떠났고, 백성들도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빌론의 느브갓네살에게 함락(B.C. 599) 된지 12년 곧 B.C. 587년에 받은 예언( 33-39)을 보면 이스라엘의 지도층에 대해 실망한 하나님은 장차 메시야를 통해 친히 자기 백성들을 다스리시는 이스라엘의 회복과 극적인 최후 승리가 상세히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 25년 곧 B.C. 574년에 받은 예언인 에스겔 40장부터는 수많은 하나님의 구원의 백성들이 포로에서 돌아와 대규모의 성전 재건을 위한 길을 예비할 것이고, 환상을 통하여 장래의 성전과 갱신된 예배의식, 그 땅의 구분 등 아직 완전한 성취를 미래에 남겨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20)
이스라엘의 회복(restoration)은 근본적인 회복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목자)과 백성()의 관계회복( 34), 살고 있는 고토(故土)인 이스라엘 땅으로 인도하시는 회복(36), 마른 뼈와 같이 죽은 이스라엘에게 당신의 영(Spirit)을 그들 속에 두어 다시 살 수 있게 하신다는 근본적인 회복(37)의 메시지였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현실적인 상황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와 평행선에서 맞물려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백 투 예루살렘”은 아주 중요한 개념입니다. 유대민족의 선택된 축복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맺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고( 22: 15-18; 26 :2-5; 28:10-15),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선지자들의 자손들( 3: 1-2; 3: 25-26)이었으며, 결국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탄생시켰고( 9: 4-5), 하나님은 유대인들을 이방의 빛으로 삼으셨습니다( 13:47-48; 2:2-3; 2:19). 그러나 그들이 이 모든 축복을 놓치고 말았지요.  그래서 전에 순종치 않던 이방인들이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 때문에 하나님의 자비를 입게 되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11:30).  이와 같이 지금은 순종하지 않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도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구원의 사건을 보고 시기가 나서 회개하고 돌아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11: 31).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입니다.  그 비밀은 이방 사람의 수가 다 찰 때까지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서 일부가 완고해진 대로 있으리라는 말씀과 온 이스라엘 백성들도 결국에 가서는 구원의 은총을 받게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11:25-26).  그래서 복음의 관점에서 판단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방인들이 잘 되라고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지만, 택하심을 받았다는 관점에서 판단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조상들과 맺은 언약(Covenant) 덕분에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회복하는 백성들이 되는 것입니다( 11:28).

21)
위의 로마서 본문들을 살펴보았듯이 "Back to Jerusalem"의 개념은 아주 단순합니다.
 우리는 유대인들의 불순종 때문에 이방인 주제에 하나님의 자비로 복음을 듣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제 이방에 복음이 편만해져서 그 수가 다 차게 되면, 유대인들도 구원을 얻게 된다고 하나님이 성경에 분명하게 말씀하셨으니( 11:26), 이방인(gentile)으로서 구원을 얻은 우리가 마땅히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모든 편견을 버리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이루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22)
마지막 종말인 주님의 재림의 시기는 세계복음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 7-8절에도 “이스라엘의 회복(되돌림)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아버지의 권한으로 정하신 것이니 너희가 알바 아니다.  그러나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 끝에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라고 하셨고,  마태복음 24:14절에도 “이 하늘나라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서, 모든 민족에게 증언될 것이다. 그 때에야 끝이 올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8절에 기록된 “땅 끝”(the ends of the earth)은 당시 성서시대에는 로마제국이었다.  그러나 후기에 선교학적인 측면에서 땅 끝은 전 세계 선교사들이 파송되어 있는 선교 현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교사들의 이야기는 제각기 모두 자신들이 땅 끝에 와서 선교를 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것도 역시 잘못된 표현이 아니라 미전도 종족이 사는 지리적 끝이 땅 끝이라는 것으로 이해를 하면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23)
우리는 어떤 방도로든지 10/40 Window 안에 있는 미전도 종족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며,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실크로드(Silk Road)를 중심으로 마지막 선교의 불모지인 중동의 화약고 안에서 살고 있는 유대인들과 이슬람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 시대적인 선교과제라고 확신합니다.
 만일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10/40창안의 미전도 종족들과 중동의 이슬람과 유대인 선교와 성경이 약속한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해서 별다른 관심이 없고, 정치목사라는 이름이나 붙이고 다니면서 공갈 협박이나 하고, 남의 약점이나 흠집을 내서 용돈이나 뜯어먹고 살겠다는 부랑자 같은 사람들은 “Back to Jerusalem”이라는 용어를 몰라도 되고, 사용할 일도 없고, 사용해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용어는 주님의 재림을 학수고대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선교현장의 용어이기 때문에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영원한 구호가 될 것이고, 현실적으로 이루어질 선교 용어가 될 것입니다.  

24)
이 시대의 작은 영웅은 선교사들입니다.  생명을 걸고 영적인 대접전지인 미전도 종족과 아랍의 이슬람권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 최전선 봉우리에서 승리의 영광스러운 복음의 깃발을 꽂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선교사로 나가지 못했다면, 선교사들 앞에서 부끄러워하고, 옷깃을 여미며, 자신을 극도로 낮추기라도 해야 합니다.  그들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진정으로 우러러봐야 합니다.  언제든지 지역교회에 선교사가 방문하면 선교소식과 함께 현재 세계선교상황과 영적인 시대적 분위기와 기류들을 말씀과 함께 경청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적인 시대적 조류를 가장 민감하게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 현장 선교사들입니다.  영적전쟁의 분위기를 가장 실감 있게 접하고 있는 사람들이 선교사들입니다.  전문 선교사들과 목회자들은 서로 영역이 다르며, 서로 존중하고 서로 협력관계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동역관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25)
“세계영적도해”(Global Spiritual Mapping)라는 최 바울 선교사의 저서 내용을 들먹거리며 이단성이 짙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단성 시비문제로 최 바울 선교사를 대항한 공개 토론의 장에 나오라고 하면 아마 한사람도, 그림자도 나타나지 못할 사람들이 상대방의 배려도 없고, 학문적인 소양도 없이 공연히 음해하고 좌파성향을 가지고 파괴를 일삼고 있습니다.  이 책의 내용 가운데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신학사상은 하나님의 강력한 주권사상(主權思想)입니다.  야웨 하나님은 역사의 주재권자로서 전능하시고 선하신 목자이시며, 처음과 나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역사 뒤안길에는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책입니다.

26)
영적인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고, 기독교 역사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앞으로 다가올 마지막 때를 분석하고 이해하며, 대처하고 대안을 제시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역사와 동떨어진 몽롱한 꿈속의 이아기가 아니고, 언제나 그것은 시공간을 초월한 영원한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도 이러한 위기의식을 갖고 신앙생활을 했고, 오늘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무엇이 그리 다르고 틀리며, 맘에 들지 않는가?  그렇다면 토인비의 역사관은 믿고 있는가?  미래학자들의 주장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일리가 있다고 깊이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연구를 해 보지도 않고, 영감이 떠오르지도 않으며, 현장 경험도 없고, 체험도 없다면, 어떻게 영적인 일에 대해서 논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도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4:35) 하시면서 밭을 보시고, 영혼구원을 적용하셨고,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하는 무리들을 보시고, 영혼추수를 생각하셨습니다( 9:36-38).

27)
우주 천체의 세계도 우리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무궁무진한 미지의 세계인데, 하물며 시공간을 초월한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는 우리가 얼마나 알고 있는가?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오만을 부리지는 않는지?  천상의 영적 존재들은 언제 창조되었는가?  아니면 스스로 있는 것인가?  어두움의 권세 사단(Satan)과 그의 똘마니들(gods)은 언제 창조되었는가? 아니면 스스로 있는 것인가? 고대 근동에서 일어났던 네피림 사건( 6:1-4)은 도대체 영적인 존재들(천사)이 세상에 있는 여자들과 어떤 교감이 있었고,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가? 육신의 한계를 안고 살아가면서 영적인 세계를 얼마나 알며, 영적인 존재들이 어떻게 활동하고 있는지?  우리가 다 알고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28)
미혹의 영, 거짓의 영인 사단(Satan)도 문화를 배경으로 역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유교문화와 불교문화, 빈곤과 부의 문화, 미신과 샤마니즘 문화, 우상숭배와 귀신 문화, 지식층과 권력층 등등, 문화의 옷을 입고 역사하는 것입니다.  어떤 특정한 국가나 지역의 독특한 문화를 배경으로 사단이 역사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문화를 배경으로 사단이 역사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부인한다면, 결국 그것은 사단의 실체를 부인하는 것과도 같은 논리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에도 갈대아 우르의 우상숭배 문화에서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던 일도 결국은 하나님과 대결해보겠다는 악한 바벨탑의 문화였습니다.  사단이 사악한 전략을 가지고 인간문화를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죄악의 소굴이 되도록 장악하기 때문에 우리도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기독교 문화를 열심히 창달해 나가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광의적인 의미에서 종교는 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선교사들이 파송되는 나라의 기초 문화인 언어를 익히고, 그 지역의 뿌리 깊은 문화를 연구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문화를 알면 역사의식이 생깁니다.  올바른 기독교 신앙이 뿌리 내리면, 문화가 달라지고, 문화가 달라지면 올바른 역사의식이 정립되는 것입니다.  선교사역은 단순히 미전도 종족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천국문화와 하나님 나라의 역사의식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29) IHOP
은 미국의 크리스챤들이 주도하고 있는 국제적인 기도의 집입니다.  기도원이라는 특수한 성격 때문에 24시간 언제든지 기도할 수 있는 곳이지요.  그런데 자칭 ()사도들이 N교회에 초청되어 당회원 장로들을 안수하고, 자칭 예언자들이 예언하는 문제로 교회 분위기가 시끄러워졌다고 합니다.  이러한 문제도 국제기도원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고려한다면 한국에서도 기도원마다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평범한 사건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 기도원이 24시간 기도만 하고 있다고 해서 문제가 될 것은 전혀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아니라 기도원이기 때문이지요.  만일 문제가 있다면 오히려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문제가 심각한 것입니다.  목사님들이 모이는 모임의 종류 가운데도 기도모임이라는 모임이 있습니다.  기도하자는 모임인데, 기도를 아무리 많이 한다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기도를 하루에 25시간 한다고 해도 문제가 될 것은 없습니다.  기도하자는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기도하는 모임이라고 해 놓고, 기도는 흉내만 조금 내고, 정치적인 주제를 가지고 서로 정보를 교환하는 것이 그 모임에 목적이라면 그것은 문제가 있는 기도모임이지요.  기도원이 선교는 안하고 기도만 열심히 한다고 해서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미국 목사님들도 24시간 계속적으로 기도하는 것이 특징인 IHOP(국제기도의 집)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기도를 하루에 30분도 안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기도를 많이 하는 기도원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이지요.  

30)
그러나 문제는 “자칭 예언자다.” “자칭 사도다.”라는 것인데, 이는 예언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엉뚱한 사주팔자 운명을 점치는 식의 미신적인 은사로 오해하여 잘못된 은사 사역을 시행하거나 이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언의 활동을 구약의 예언자들처럼 하나님의 메시지를 하나님 편에서 대사로서 인간에게 전달하는 예언자적인 정신의 메신저 역할로 이해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언을 한다면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예언이 미래를 점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성경을 통해 주신 말씀을 문화적인 측면에서 또는 역사적인 측면에서 그 약속과 성취를 적용하는 정도의 예언활동이라면 문제가 전혀 되지 않는다고 사료됩니다.  
     
자칭 사도라는 문제도 신학적으로 신사도 운동이라고 이미 지적한대로 12사도 외에는 사도가 없는데, 기필코 자칭 사도라고 하니 문제가 있는 것이지요.  교회를 그토록 박해하던 바울도 정상적인 12제자의 수에는 들어가지 않았지만, 회심한 후에 특별히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따로 세우심을 받아 사도가 되었고( 1:1), 맨 나중에 마지막 사도가 되었으며(고전 15:8),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했던 이유 때문에 자신을 가장 작은 사도요, 또한 사도라고 불릴 만한 자격도 없는 사람이라(고전 15:9)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도 그의 사도성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심을 받은 정황들을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1:1).  오늘날에도 자칭 사도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그러나 자칭 사도라는 호칭은 영감으로 된 하나님의 말씀인 계시를 전달받는 사명을 제외하고는 “자칭 예수” “자칭 하나님” “자칭 성령님” “자칭 교주”라는 주장과 차별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한다면 자칭 사도라고 하는 사람들이 성경 66권외에 또 다른 계시를 받았다고 하지 않는 한, 그들의 사역이 사도적인 정신을 이어받아 원색적인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담대히 전하는 것으로 이해를 한다면 큰 문제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신학적인 불건전한 용어 사용을 이유로 영광스러운 복음전파의 사역을 방해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다른 모든 죄는 용서를 받아도 복음전파 사역을 방해하는 죄, 즉 성령을 모독하고 성령의 역사를 조롱하고 비웃는 자들은 이 세상에서와 오는 세상에서도 용서를 받지 못할 것이라고 강력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믿지 않을 때 몰라서 저지른 성령 모독죄는 몰라도, 알면서 의도적으로 성령의 사역을 방해하는 죄는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행동이 지금 복음전파를 방해하고 있는지?  아니면 복음전파에 호의적인지? 스스로는 잘 알고 있고, 또 그런 판단은 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부흥이 결국은 선교이고, 선교는 모든 믿는 자들의 사명입니다.  오순절에 성령님이 강림하셔야만 했던 이유도 바로 복음 선교를 위한 것이지요.  만일 누구든지 선교에 관심도 없고, 선교를 오히려 방해한다면, 진정으로 성령님이 그런 사람에게 내주(來住)하고 계신가? 의심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12:30
나와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은 나를 반대하는 사람이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않는 사람은 해치는 사람이다.

12:31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무슨 죄를 짓든지, 무슨 신성 모독적인 말을 하든지, 그들은 용서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용서를 받지 못할 것이다.

12:32
또 누구든지 인자를 거역하여 말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을 것이나 성령을 거역하여 말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도 오는 세상에서도 용서를 받지 못할 것이다.(마태 12 :30-32)

31) 1970-1980
년대만 해도 한국교회는 어리석게도 Out Side Church Movement(교회 밖의 선교단체)들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오해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이유는? 첫째, 선교단체에 속한 사람들을 전통교회가 사역의 장을 열어주지 못함으로 그들이 전통교회에 적응하기가 매우 어려웠기 때문이며, 전통교회도 그들을 수용할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서로 Code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전통교회의 사역의 중심이 담임목회자의 1인체제로 교인관리 중심이었기 때문에 전통교회에서는 평신도들의 사역의 장이 없어서 전도와 양육이 자유롭고 활발한 선교단체로 사역인력이 빠져나간다는데 대한 불쾌한 감정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전통교회에 유익이 되지 못하는 선교단체는 이단으로 취급했고, 선교단체들은 전통교회와의 친밀한 동역관계를 나타내기 위하여 십일조 헌금이나 주일성수는 물론이거니와 수요예배 및 각종 집회에도 적극 참여하도록 전통교회의 민감한 사항들에 대해서 선교단체들이 신경을 곤두 세웠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건전한 선교단체는 지역교회를 돕고, 지역교회는 선교단체를 물질로 후원하는 아름다운 관계가 과거에도 이루어진 사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선교는 지역교회가 그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일꾼을 인터콥 선교단체가 빼앗아간다는 사소한 감정 대립으로 인하여 이단 시비가 된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그것도 미성숙하여 지혜롭지 못하고 신앙이 여린 일부 지역교회 성도들이 자신이 섬기는 교회와 불협화음으로 생긴 어쩌다 생기는 미미한 사건들을 가지고 인터콥을 이단시비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단순히 정치적 놀음이지 사실과 거리가 먼 유치한 논쟁이며, 지나가던 소도 웃을 일입니다.
 
32)
사소하고 미미한 문제의 사건을 확대해서 거대한 하나님의 일을 그르치는 것은 사역자들의 지혜가 아니라고 봅니다.  물론 인터콥 선교단체는 자체 선교단체라는 열악한 환경 조건이 있습니다.  지역교회는 평신도 전문선교사나 신학을 공부한 전문선교사를 발굴해서 훈련하거나, 선교단체에 위탁 교육하여 자체적으로 단기선교나 장기선교사로 파송을 하고, 선교사를 후원 또는 다른 선교사를 협력선교 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지역교회에서도 전략적으로 평신도 선교사들을 훈련하여 집단적으로 가족들을 선교지에 이주시키기도 합니다.  그들은 안정된 직업과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선교지에 가서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하기도 하지요.  처음으로 예수를 믿고 신앙 생활했던 어머니와 같은 교회를 떠나 선교지에서 교회를 세우고 그곳에서 평생을 보낼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특별한 집회에 참석했다가 감동을 받아서 선교에 대한 개인적인 소명(Calling)을 받기도 하지 않습니까?  
     
이러한 모든 현실은 선교적인 입장에서 보면 매우 자연스러운 사건들입니다.  인터콥 최 바울 선교사로 인하여 이러한 면에서 “지역교회가 크게 피해를 입었고, 손해가 말이 아니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매우 어리석은 발언입니다.  정말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현실일까요?  좀 더 냉정하게 생각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지역교회가 선교단체 때문에 큰 피해를 입은 것이 아니라, 교회의 존재 목적을 다시 한 번 회복하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와 선교는 불가분리의 관계입니다.  교회가 선교의 진원지가 되어야 하고, 선교가 최전방 영적 전쟁의 접전지라면, 교회는 후방에서 인적 자원과 물자를 공급하는 든든한 선교의 후원자가 되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지역교회가 선교단체에게 사람을 빼앗기고, 물질에 손해를 입었으며, 교회 안에 선교 단체가 더욱 부각되는 혼동이 왔다고 말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지역교회 지도자들이 교회의 성벽만 높이 쌓아 오렸지, 선교에 대한 관심조차 전혀 없다는 단면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더 알기 쉽게 설명을 한다면, 지역교회와 선교단체간의 불협화음이라는 논쟁은 간혹 가다가 발생하는 미미한 사건이지만,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국방을 수호하는 군인으로서의 징집명령을 받은 아들에게 “왜! 군대를 꼭 가야 하느냐?” “집에서 편하게 출퇴근하는 지역방위군으로도 복무하는 방법이 있을 텐데, 꼭 그렇게 까지 해야 하느냐?” 이와 같은 매우 부끄럽고 미성숙한 발언과도 같은 이야기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33) 사실은 이러한 일반적인 사건보다 더 심각하게 문제를 직시하고 근본적으로 해결해야할 지역교회들 간의 긴장관계는 무엇일까요?  물론 이단 사이비 척결기관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교회와 교회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존교인들의 수평이동 문제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그 무엇보다도 지역교회는 불신자 전도로 영혼구원에 대한 기쁨과 감격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요즈음 전무한 시대입니다.  한 해 동안 불신자가 전도되어 예수님을 영접하고, 세례를 받는 사람 숫자를 기준으로 교회 성장을 가늠해야 하는데, 교인들의 수평이동을 가지고 부흥의 통계치를 내고 있으니 한심할 노릇입니다.  세례를 받는 사람은 가뭄에 콩 나듯하며, 수평이동만이 목회자들의 성공심리를 부채질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이러한 어두운 현실은 수평이동을 하는 어리석은 교인들도 골치 덩어리지만, 수평이동을 즐겁게 받아드리며, 교회 성장주의로 일관하는 세속적인 교회도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34)
영적으로 황폐할 뿐만 아니라 기독교인들을 단순한 이슬람 종교법을 적용하여 무참히 참수시키는 선교지에서 하나님 나라의 여명을 기다리면서 꺼질 듯 흔들리면서도 작은 불씨로 살고 있는 이들을 위해서 한번 찾아가서 선교현장을 방문하거나 기도해 주지 못할망정 함부로 쉽게 이단 사이비 운운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소원과는 거리가 먼 좌경화된 고질적인 발상이 아닌가 싶습니다.    

35)
그러므로 이미 뉴욕 교계에서도 만연된 교회 직분자들의 수평이동 문제와 뉴욕지역을 포교 활동하는 거점으로 삼고, 수백 명의 종교적 암 세포로 활발하게 서식하고 있는 신천지 이단에 대한 대처가 시급한 사안입니다.  교주 이만희 씨의 거짓된 교리에 희생양이 된 무지한 자들이 가출, 이혼, 학업중단, 병역기피, 가정과 사회질서 파괴로 이어지는 불행에 대해서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진짜 이단과 피를 흘리기까지 싸우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힘든 전쟁입니다. 그러나 집안 형제들과 싸우는 것은  누워서 떡먹기식입니다.  세이총이나 이대위는 집안 형제들과 쉬운 싸움에 목숨 걸지 말고, 피를 흘리기까지 싸워야하는 이단들과 목숨을 걸어야 명분을 회복할 것입니다.
     
36)
미동부지역과 뉴욕의 교협 산하 이대위 관계자들, 그리고 이미 세칭된 “세이총”과 “진목연”이라는 유령단체가 인터콥(최바울 선교사)에 대하여 심심하면 동일한 내용을 가지고 반기독교적인 언론과 결탁하여 인격살해 행위를 지속적으로 전개하는 행위는 정치적 갈등 문제이지? 진리를 수호하는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 감지되었습니다.  더 이상의 소모전은 본인들에게도 마음만 사악해질 뿐, 신앙적으로 치명적인 손실이 올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 건설에도 파괴적인 역기능(뒷발질)이 될 뿐입니다.  

37)
공식적인 이단종파 “신천지”와 “이슬람 근본주의”를 주제로 세미나를 열어야할 시기에 30년 경력의 이슬람 선교전문가인 인터콥의 최 바울 선교사를 성경의 골리앗으로 비유하며, 어린 다윗에 의해 거대한 골리앗 즉 인터콥(최바울 선교사) 선교단체가 무너지기라도 한 것처럼 통쾌함을 언론에 여론몰이를 조장하는 것은 무지와 무법, 반성경적인 그럴싸한 인위적인 논리와 거짓으로 조장된 좌파 사이비 집단의 거짓 승리로 판단되었기 때문에 뉴욕 교계가 더 이상 이를 참고 용납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더욱이 30년의 긴 역사를 가진 선교 단체인 최 바울 선교사와 인터콥을 붕괴시키는 것이 새롭게 정비된 진목연과 자칭 세이총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명시하고 있는데, 이것만 보더라도 이들은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데 쓰임 받는 사람들이 아니라 무시무시한 어두움의 세력이요. 악한 사탄의 도구들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지역교회 목회도 잘 안되는데, 대형교회든 큰 선교단체든 다 깨부수자!” “이번 인터콥을 무너뜨리는데 성공하면 대형교회나 중형교회들로부터 흠집을 잡는 정도에 따라서 원하는 욕구를 자연스럽게 채울 수 있겠다.”는 이단 감별사들의 정신 빠진 논리를 구상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작금의 세태가 오죽 혼탁하면 “기독교 이단 사이비연구”라는 책 후편으로 “이단사냥꾼(이단감별사)의 속성”이라는 책이 2010 8월에 출판되었겠습니까?  그렇다면 신앙적으로 좌경화된 이단 사냥꾼(감별사)들은 언제까지 생존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형제들, 즉 기독교선교단체들과의 소모적인 전쟁을 치러야 할 것입니까?  세이총과 진리수호목회자연대에 연대한 사람은 적어도 이단이라는 명단에서 제외되고, 연대 안한 사람을 이단으로 만들기 까지 끝없는 싸움을 전개해야 할 것입니다.
         
38)
어설프게 공부한 신학을 적용하지 않더라도 이단과 사이비는 매우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이며, 유치하고, 앞뒤 논리도 맞지 않을뿐더러 입술이 성별되지 않은 거짓을 말하기 때문에 지역교회에서 신앙훈련이 잘된 평신도들은 금방 알아차리고 “이것은 이상한데, 무언가 잘못되었구나!”하고 뉘우치게 됩니다.  왜냐하면 진리의 성령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16:13).  진리는 언제나 보편적이며, 특정한 사람들의 전유물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입맛이 통하는 몇몇 목회자들이 자신들의 연구 발표된 이단판결 내용도 아닌, 전혀 검증되지 않은 다른 사람들의 좌파성 글과 주장을 근거로 하여 이단감별사 노릇을 하는 것은 표절에 불과할 뿐 공명심에 대한 탐욕이며, 그 잘못된 결과에 대해서는 엄중한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죄는 은밀하게 짓고 있는 것 같지만, 심판은 분명히 공개적이 될 것입니다.            

39)
뉴욕교회협의회 총회에서 정당한 절차와 공정한 투표를 통해 현직 회장에게 교협회장의 직함을 주어 1년 동안 열심히 봉사하게 했으면, 적어도 협력은 해야 하는데, 성실하고 모범적인 개혁을 시도하는 교협 기관의 책임자를 비방하고, 헐뜯고, 야유하며, 잘하고 있는 사람을 끌어내리기라도 하듯이 이와 같은 못된 습성은 일부 목회자들의 좌경화된 세속정치 풍토를 본받아가는 행위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한국 세속정치판에는 공개적으로 좌파들이 활동하고 있지만, 기독교 선교단체나 교회 안에도 좌파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확연한 증거들이 속속 들어나고 있는 현실입니다.

40)
기독교를 대변해야할 기독교 언론사들이 제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기독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득과 실에 대한 양심적 고민도 없이 돈벌이에만 혈안이 벙벙하여 선교와 전도의 앞길을 막고, 안티 기독교인들만 양성시키는 반 기독언론을 폐쇄하고, 여기에 맞설 수 있는 건전한 기독교 신앙을 중심으로 복음전파의 기수가 될 언론의 육성이 현실적으로 절실함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바입니다.  좌파 안티 기독교 신앙으로 기독교인들의 마음을 황폐하게 만들고, 상하게 하는 죄로 얼룩진 자칭 기독교 언론 기관은 독자들이 스스로 멀리하고, 관계를 끊는 폐쇄운동을 벌여야 할 것입니다.    

41)
언젠가 댓글을 단 내용 중에 가명인 Doctor라는 분은 조직신학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돌파리 의사 같구나?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이단에 대한 판단기준은 간단명료하지만, 신학은 심오한 학문이기 때문에 진짜 문제가 있으면 많은 시간을 함께 토론하고 연구하고 상대방의 의견과 사상도 들어보고 어떤 측면에서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는지? 등등. 학자적인 소양과 신앙 인격이 동반된 신학 논쟁이라야 설득력이 있지?  가장 무식하면서도 혼자 잘난척하는 것은 나중에 후회할 분명한 증거를 흘리게 되는 것이지요.

42)
어떤 신학자가 "백 투 예루살렘" 구호에 대해 이단성 운운하며, 세대주의라고 하는 얼빠진 사람이 있는가?
 어떤 신학자가 선교현장에서 "땅 밟기 선교" 구호를 내걸었다고 샤마니즘이니 무당이니, 베뢰아 귀신론이니 하는 사람이 있는가?  문제가 되는 그것은 적용에 관한 문제이고, 방법에 관한 문제일 뿐이지?  그 자체를 가지고 신학사상 운운하는 것은 학자적인 소양을 갖고 있는 분이 전혀 아닙니다.  모든 선교가 남의 땅(타민족)을 밟는 것부터 시작인데, 땅을 밟지 않는 것이라면 공중전을 펼쳐야 선교가 된다는 것입니까?  고무  풍선을 띄워서 전도지를 살포하는 방법으로 선교를 해야만 합니까?  “땅 밟기”가 잘못된 사상이라는 것은 단순히 강남에 있는 불교사찰인 봉은사에서 성숙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무례하고 비도덕적으로 상식 이하의 불법적인 행동을 해서 문제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잘못된 비 신앙적인 행동으로 규정한 것이지요.  “땅 밟기” 구호만 외치면 그것이 무속신앙이고, 미신이며, 베뢰아 귀신론이고, 이단성이 있는 것입니까?  절대 그렇게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땅을 밟고, 어떻게 땅을 밟느냐?가 문제이지?  “땅 밟기가 비성경적이다.”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1:28; 12:1; 13:15;).  이것 또한 선교적인 구호라고 할 수 있습니다.

43)
물론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본래 쪽 집개 학원강사(이단 감별사)는 두 가지 면에서 학교 정규교사(목회자)와 다릅니다.
 첫째는 쪽 집은 것만 알고 전체적인 것은 모르기 때문에 쪽 집은 것이 잘못되었을 때는 전체가 잘못된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살아갑니다.  폭넓은 사고력과 풍부한 철학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앵무새에 불과한 것이지요.  남들이 그렇게 이야기 하니까 그런 줄 알고 함부로 이단을 정죄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신실한 제자 즉, 그리스도의 사역을 위임받은 사역자가 그 밑에서는 절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제자가 만들어 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따라주지를 않습니다.  ()을 보여주는 것이 없기 때문이지요.  쪽 집개만 가지고 이 사람 저 사람 집어대는 짓만 해왔고, 이단 만들기 공장 일만 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것을 한 번도 보지도 못하고, 누려보지도 못했으며, 자기 눈에 들보는 깨닫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눈에 티만 집어 올리다가 인생을 허비하는 사람들입니다.

44) 2011
7 11() 금강산 연회장에서 목사회가 주관한 세미나가 열렸습니다.
 언론에 실린 세미나 내용들을 읽어보니 목사회가 “정말 강사다운 강사를 모셨구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났습니다.  강사 안산동산교회 김 인중 목사님 같은 분이 뉴욕에 계시면 좌파들이 이단사냥(정죄)이라는 무기를 내려놓을 것 같구나!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뉴욕의 교계 실정에 꼭 맞는 말씀들이었고, 특별히 좌경화된 사이비 이단 대책위원들과 세이총이나 진목연이 꼭 한번쯤은 들어야 할 내용들이었습니다.  물론 개인적이고 주제 넘는 이야기 같지만 다음번엔 교협이 주관하는 할렐루야 전도집회 강사로 김 인중 목사를 강력히 추천하는 것도 이상적이고 현실적인 대안인 것 같습니다.

44)
이단 사냥꾼들(세이총, 진목연, 동부 이단대책 위원회 중 몇 사람)은 결국 이스라엘의 왕, 성군이었던 위대한 다윗에 비유할 것이 아니라 의처증 환자로 비유되어야 마땅하고, 블레셋 사람 골리앗의 목을 친 것이 아니라 자기 부인과 함께 자고 있던 처제를 외간 남자인줄 알고 도끼로 살해했던 정신 나간 사람으로 비유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동안 인터콥을 이단으로 몰아 온갖 거짓과 사악한 상상의 날개를 달고 사냥을 했는데, 알고 보니 한 가족이었고, 한 형제였다면 이는 돌이킬 수 없는 비극적인 운명이요, 그 죄책감을 평생 짊어지고 살아가야 하는 꼴이 될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45)
뉴욕교계에도 종교 좌파가 있다는 것이 이제 확인되었으니, 뉴욕과 뉴저지 교계 목사님들도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지만, 그래도 더욱 분별력을 가지고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여 주님의 지상명령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교회가 소극적인 대처로도 선교의 사명을 잃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미전도 종족 그것도 가장 영적으로 취약한 최전선 중동 이슬람 전문선교단체를 붕괴시키려고 하는 사단의 속임수에 대한 지혜로운 적극적인 대처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좌경화된 자칭 이단 전문가들은 이단 척결하려는 자세는 보이지 않고, 비방, 흠집, 파괴 등 반기독교적인 태도가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46)
그리고 뉴욕의 기독교 인터넷 사이트 중에서도 안티 기독교적이고, 하나님 나라를 훼방하는 집단이 버젓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는 더 이상 교회와 하나님 나라 건설에 동참하는 집단이 아니고, 선한 일을 비방 음해하고 깨부수며, 방해하고 헐뜯어 성령의 사역을 훼방하는 어두움의 좌파 조직임을 다시 한 번 여러 정황과 증거들을 통해 확인하는 바입니다. 이들에게도 과연 그리스도의 영이 계시는지 의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적나라하게 그 정체가 만인 앞에 폭로된 것처럼, 종교 마피아적인 좌파 안티 기독교 사이트입니다.  기독교 언론매체는 진실성과 기독교 신앙이 담보되어야 합니다.  안티 기독교 사이트에 들어가기만 해도 영적으로 황폐함을 느끼게 됩니다.  이제는 더 이상 뉴욕 교계를 위해 존재할 가치가 없는 언론이니 마피아조직과 같은 이단사냥꾼들과 함께 오늘 당장 폐쇄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을 확신합니다.  모든 좌파들과 안티 기독교 글들만 남기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신실하게 애쓰는 목사님들의 글은 몽땅 즉시 닫는 것을 보니 더 이상 관망할 수도 없는 입장이고, 앞으로는 기독교 복음전파와 성경말씀의 진리를 대변할 건전한 언론만을 육성해야할 필요성이 여러 목사님들 입에서 제기되고 있는 실정에 도달했습니다.  반드시 신앙적으로 유익하고 건전한 언론과 좌파 안티 기독교 사이트와는 차별화하여 건전한 기독교 인터넷 사이트를 도와주어야 마땅함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47)
세이총이나 진목연이나 똑같은 종교마피아 조직단체인 것 같은데, 실상을 모르고 자의반(自意半) 타의반(他意半) 이름이 올라와 있는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된 사람 하나 없는 것을 보면, 이 조직은 사조직에 불과하고 유명무실한 유령단체인 것을 금방이라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또한 공인된 교수가 혹 인터콥 지도위원에서 탈퇴하는 경우는 인터콥 선교 단체에 대한 반대 입장이 아닙니다.  그것이 목숨을 걸고 싸울 사안도 아니고, 구설수에 오르는 것을 원치 않는 입장이지, 그러한 정치적인 처세를 모두 인터콥 선교회 이단성 시비에 동조하는 것으로 보면 본인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일방적인 잘못된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신학을 교수하는 일에 늘 시간이 쫓기고, 연구논문 발표하기에도 일정이 빠듯한데, 언론에 부정적으로 얼굴 팔리면 시간과 에너지, 금전적인 손해로 인한 신상에 좋지 않은 일을 누가 모를 사람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이런 저질스런 논쟁에 휘말리지 않는 것도 학자로서 때를 기다리는 현명한 자세이고, 지혜로운 정치적 처세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48)
손봉호 교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거대한 공룡이 지구상에서 한순간에 멸종되었듯이 인간도 몸집을 부풀리면 모두 부패하게 되어있고, 망하게 된다는 교훈이 기억됩니다.
 피로 값 주고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 공동체를 사이비 이단 집단으로부터 보호하고, 성경말씀의 진리를 대변하고 수호하는 일은 소위 세이총이나 진목연의 권모  술수와 같이 언론 게임을 하고 대중을 선동하며, 세상 사람들이 이용하는 세속적인 힘의 규합과 결집과 연대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모든 세상 권력 군왕들과 천하를 호령하던 제국들이 다 한 번씩 무너지고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올바로 쓰임을 받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역행하는 모든 세속적인 힘의 논리는 몸집을 부풀려 자취를 감춘 지구상의 공룡처럼, 스스로 멸종될 증거를 충분히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얼마나 보수와 정통파 개혁주의에 대해서 깊이 알고나 있는지? 입증할만한 증거를 찾기가 쉽지 않지만, 스스로 성경과 신학에 대해서 모든 것을 통달했고, 성경에 대해서 박식한 것처럼 위장하면서 신실한 선교사들과 그 사역을 흠집 내고, 인격 살해하는 행위는 어떤 이유로든지 매우 우려할만한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49)
신앙 생활하는 것이나 목양(牧羊)의 성실성을 보아서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주창하는 이론이나 사상이 진리에 기초하지 않으면, 언제나 탁상공론에 불과합니다.  삶 가운데 검증되지 않은 것을 진리인 것처럼 포장하여 위선적으로 제시하는데, 속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은 남을 판단하고 가르치는 가르침이 자신의 삶과 괴리현상이 가득하지만, 삶과 가르침에 전혀 괴리가 없으셨던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은 유일하신 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분을 본받고 닮아가야 할 것입니다.  

과연 예수님이라면 인터콥 선교회와 최 바울 선교사를 이단성이 짙은 해외선교단체라고 정죄하고, 인터콥을 허물겠다고 온갖 협박과 으름장을 놓으며, 비전스쿨을 좌경화된 언론과 결탁하여 물리적인 힘으로 방해하겠습니까? 상종해서는 안 될 원수 대적 골리앗이라고 생각하고, 때려눕히며, 통쾌한 승리의 웃음을 자아내시겠습니까? 결코 그러시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신뢰할 만한 삶을 사는 사람의 말을 신빙성 있게 받아들입니다.
 말의 신빙성은 생활이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존경할만한 삶을 사시는 분의 충고에는 귀를 기울이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의 의견이나 제안은 건성으로 듣고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습니다.  자본론에 대한 책을 써서 공산주의 기초이론을 닦은 칼 마르크스(Karl Marx)는 정부를 착취계급의 앞잡이로 매도하면서도 정부 보조금을 받아 생활했습니다.  부르조아 계급이 노동자들을 착취한다고 열을 올려 비판하면서도 진작 자신은 몇 달씩 봉급을 안주고 하녀를 부려 먹곤 했습니다.  이념이나 사상을 쫓기 전에 주창하는 사람의 삶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솔깃한 말에 귀를 기울이기 전에 말하는 사람의 삶을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50)
어떤 한 부분의 신학적 사고를 모든 사이비 이단 신학의 전체 내용으로 보는 것은 단순히 이단 사냥에 그 초점이 있음을 확인해 주는 좋은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예외 없이 자라온 신앙배경과 신학배경이 조금씩 다를 수 있지요.  물론 완전한 신학(神學)도 완전한 신학자(神學者)도 세월이 지나고 나면 기대치에 못 미치는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지만, 처음부터 완전한 신학자 밑에서 또는 건전한 교회와 훌륭한 목회자 밑에서 배우고 자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반드시 과정을 통해 경험을 쌓고, 경험을 통해 비판의식이 생기는 것이지요.  
     
훌륭한 목사님들 가운데도 과거에는 다 신학적인 혼동의 과정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러한 과정들이 오히려 유익한 훈련 기간이었을지 모릅니다.  과거에는 한 때 베뢰아 귀신론에 접해보지 않은 사람이 별로 없고, 능력이 있다는 예언의 은사 받은 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안수기도를 받아보지 않은 사람 별반 없을 것입니다.  고도의 지능적인 최면술자가 인도하는 집회에 과연 가보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기독교 100주년을 이제 겨우 넘긴 한국 교회역사로 보면 과도기적인 세월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51)
그런데 이 시점에 와서 과거에 잠시 몸담았던 사이비 이단집단들을 열거하며, 훌륭한 목사님들이 오점으로 남긴 과거의 경험을 현재 간직하고 있는 전체신앙인양 올가미를 씌우고, 분별없이 언론에 그 이름들을 공개하는 것은 매우 파렴치하고도 오만 불손한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도 늦다고 생각지 말고, 그렇게 신학에 깊은 관심이 있고 극히 부분적인 것을 광범위하게 상상하며, 논쟁을 즐기는 은사가 있다면 후배들을 양성하는 신학교로 들어가서 강의실에서나 피터지게 싸울 것이 아닌가?  

세월이 흐를수록 신학은 점점 발전할 것입니다.  전혀 모르던 부분을 새로이 깨닫게 될 것이고, 희미하던 것들이 선명해 질 것이며, 잘못 알고 있었던 오류(誤謬)들이 발견될 것입니다.  모든 학문이 발전하듯이 신학(神學)이라는 학문도 계속 발전해가고 있습니다.  계시된 성경을 완전히 깨달을 때까지 신학이라는 작업은 계속될 것입니다.  물론 완전히 안다는 것도 일종의 교만이겠지요.  사실 구약성경의 창세기만 하더라도 우리가 얼마나 많은 부분에서 풀리지 않는 신학적인 과제들을 안고 있습니까?  () 박윤선 목사님의 강의에서도 그런 말씀을 하셨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면적이 많으면 많을수록 모르는 면적도 상대적으로 더 많아지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신학논쟁은 겸손한 자세로 해야 합니다(나중에 혹시 내가 알고 있던 정보가 틀린다면 이해해 주십시오! 라고 한다든지).    

52)
자기 신학과 확신에 가득 찬 나머지 인터콥 선교회와 최 바울 선교사를 더 이상 적대관계로 만들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영광만 가릴 뿐입니다.  우리 모두 예외 없이 모든 면에서 하나님 앞에 부족하기 그지없지만, 하나님이 “까짓것” 하시며, 사역을 맡겨주셨고, 너그럽게 봐주시는 부분이 얼마든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위치에서 하나님을 대신이나 하듯이 재판장의 위치에 앉아 자신들이 세계 이단 판결 법정이라도 되는 것처럼 오만함을 버리십시오.  

53)
단순한 신학이론을 삶에서 경험해보지도 않은 복잡한 궤변으로 대단한 실력가처럼 위장하지 마십시오.  뉴욕에도 이단성 운운하며 판단하는 귀하들 보다 훨씬 탁월한 신앙인격과 학자적인 소양과 성경실력을 고루 갖춘 학자들이 있으니, 이분들이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한 조용히 목회에만 전념하시기를 바라며, 겸손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쓰임 받으시기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54)
다분히 신학 색깔론을 가지고 남을 정죄하지 마십시오.  색깔은 언제나 시각적인 차이일 뿐입니다.  스스로 만든 정치적인 색안경을 끼고서 그런 눈으로 보면 그렇게 보이고, 건전하고 균형 있고 여유 있는 눈으로 보면 새롭게 보입니다.  인터콥을 IHOP의 신사도 운동에도 꿰어 맞추지 말고, 과거에 잠간 머물렀던 김 기동 씨의 베뢰아 귀신론에도 갔다 부치지 마십시오.  본인들도 잘 알지도 못하고 판단하는 이원론 사상과 세대주의 사상으로도 함부로 비판하지 마십시오.  사실이 아닌 궤변일 뿐입니다.  
     
세대주의에 대해서도 귀하께서 알고 있는 신학 지식과 성경과는 거리가 멀 수 있습니다.  신학 개념이란 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기 때문에 의도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전제하여 풍부한 이해력을 가지고 접근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 학문이 다 그렇지만 신학사상 역시 성경과 일치하지 않는 생사람 잡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학이라는 학문도 계속 발전해야 되고, 개혁되어야만 합니다.  성경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신학 활동을 사변적(思辨的)으로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55)
로마의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던 사도바울의 고백은 오늘날 복음을 전하는 우  리 모두에게 공감된 메시지를 충분히 전해주고 있다고 사료됩니다.

<
바울이 처해 있는 형편>
1:12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당하는 일이 도리어 복음을 전파하는 데 도움이 된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1:13
곧 내가 감옥에 갇힌 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이, 온 친위대와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므로,

1:14
주님 안에 있는 형제자매 가운데서 많은 사람이 내가 갇혀 있음으로 말미암아 더
    확신을 얻어 b) 말씀을 겁 없이 더욱 담대하게 전하게 되었습니다. (b.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하나님의 말씀)

1:15
그리스도를 전파하면서도 어떤 사람들은 시기하거나 다투는 마음으로 하고, 어떤
    사람들은 좋은 뜻으로 합니다.

1:16
좋은 뜻으로 하는 사람들은 내가 복음을 변호하기 위해 세우심을 받은 줄을 알고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지만,

1:17
시기하거나 다투는 마음으로 하는 사람들은 나의 감옥 생활에 괴로움을 더하게 하
    려는 생각을 품고 다투는 마음으로 순수하지 못한 동기에서 그리스도를 전파합니다.  

1:18
그렇지만 어떻습니까? 참으로 하든지 거짓으로 하든지, 무슨 방법으로 하든지 그
    리스도가 전파되고 있으니, 나는 그 일로 기뻐합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앞으로
    도 기뻐할 것입니다.

1:19
나는 여러분이 기도해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도와 주셔서 내가 풀려나리라
    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1:20
내가 간절히 기대하며 바라는 것은 내가 어떤 일에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전과 같이 지금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나의 몸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존귀하게 되시는 것입니다.

1:21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1:22
그러나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 보람된 일이라면
내가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1:23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훨씬 더 나으나,

1:24
내가 육신으로 남아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할 것입니다.

1:25
이렇게 확신하므로, 나는 여러분의 발전과 믿음의 기쁨을 더하게 하기 위하여,
여러분 모두의 곁에 머물러 있어야 할 것으로 압니다.

1:26
그것은 내가 다시 여러분에게로 감으로써 여러분이 나를 대면하는 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의 자랑거리가 많아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1:27
오로지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맞게 생활하십시오. 그리하여 내가 가서 여러
    분을 만나든지, 여러분에게서 떠나 있든지 한 정신으로 굳게 서서, 복음을 믿는 일
    에 한 마음으로 힘을 합하여 함께 싸우고,

1:28
또한 어떤 일이라도 대적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소식을 나에게 들려 줄
    수 있게 하십시오.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징조요, 여러분에게는 구원의 징조입
    니다.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1:29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를 위해서 고난도 받는 것은, 그리스도
    를 위해서 여러분이 받는 특권입니다.

1:30
여러분은 전에 나에게서 내가 하는 것을 보았고 지금은 나에게서 듣는 것과 똑 같
    은 싸움을 여러분도 하고 있습니다.(빌립보서 1: 12-30)

맺는 말

미동부지역의 뉴욕 뉴저지 교회와 목회자들은 하나같이 하나님 나라와 그 백성들, 잃어버린 영혼들과 미전도 종족들을 위하여 기독교 이단 사이비 집단을 철통같이 경계할 뿐만 아니라, 그 집단에 빠진 무지목매한 자들을 지혜롭게 구출해내야 합니다.
 우선 규모가 작거나 크거나 각자 처해있는 목회현장 안에서 성경공부나 설교를 통하여 성도들을 진리의 말씀으로 잘 양육해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 이단 사이비 사냥꾼(이단 감별사)들처럼 학문적 편협성과 짧은 신학적 소견을 가지고, 소극적으로 족집게 역할만 하다보면 자신도 영적으로 황폐하게 되고, 자가당착(自家撞着)으로 사이비 이단의 올무에 스스로 빠지게 되는 불운을 겪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비본질적인 일에 생명을 걸다보면 원치 않게도 가라지()를 뽑으려다가 곡식()도 뽑게 되는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주님과 점점 멀어지고, 이웃 사랑, 형제 사랑의 기독교 본질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사이비 이단 감별사들을 사진으로 보아도 하나같이 마음이 사악해져있고, 풍기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사랑의 향기가 전혀 보이지를 않습니다.  사이비 이단을 인위적으로 만들려고 하다 보니 분주하기만 하고, 실적 하나 올리지를 못합니다.  교인들을 양육해야하는 시간에 늘 쫒기고, 성경말씀 보기 바쁘며, 기도의 은혜가 메마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사람이 사악해 집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할 사람들이 그 귀가 막히고, 종교의 영에 사로잡혀 앞뒤를 분별하지 못하는 영적 폐인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진리의 말씀의 적극적인 대변자가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선한 일은 어디까지나 선한 방법으로 지혜로운 방법으로 이루어야 합니다.  목회자로 부르심을 받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면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고, 교인들을 양육하여 교회를 잘 세우는데 주력을 해야지, 전무할 것이 없어서 사이비 이단 감별사로 명성을 가지려고 하는 발상이 과대망상증과도 같습니다.  이단 사이비는 자연스럽게 감별이 되는 것이지, 구태여 조직배들을 만들어 연대하면서 그 임무를 수행할 이유는 전혀 없는 것입니다. 공회를 통해 이미 확실하게 들어난 이단집단들을 경계하고, 홍보해야 합니다.  종교는 권력과 힘이 필요하지만 기독교의 생명은 세속적인 힘과 권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에 베드로가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내리쳐서 귀를 잘랐을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사용하는 사람은 모두 칼로 망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6:52).

교회부흥은 자연스럽게 세계선교로 이어지고, 선교하는 교회는 부흥하게 되어 있습니다.
 10/40 창의 최전방 미전도 종족 개척선교를 목적으로 설립된 30년 전통의 해외선교기관 INTER CP을 중동 이슬람선교지도 한번 가보지도 못한 사람들이 선교를 방해하는 음모는 종교 좌경화의 원인과 그 배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이비 이단 척결의 목적이 하나님 나라와 그의 백성들을 위한 순수한 진리의 싸움이 아니라 신실한 목회자들과 선교사들을 볼모로 잡아, 교회를 어렵게 만들고, 마귀의 궤계에 동조하여 마귀를 도와주는 일을 한다면 얼마나 기독교 역사에 오점을 남기는 비극적인 일이겠습니까?

더더욱 비극적인 일은 외간 남자인줄 알고 부인과 함께 곁에 누워 잠자던 처제를 살해한 사건은 두고두고 이단 사이비 감별사들에게 크나큰 교훈이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신실한 사역자 한사람을 정치적인 희생양으로 삼고, 신학사상이라는 굴레를 씌워 무차별 인격 살해하는 현대판 카인의 역할과 언론의 힘으로 이 일에 공조한 안티 기독교 인터넷 사이트도 결코 편안한 밤이 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더 이상 영적인 불모지인 뉴욕 도성에 비방과 거짓과 협박을 통한 정치적 누리꾼들의 파도가 일지 않도록! 중보기도의 힘을 모아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글을 마치겠습니다.

주님 안에서 은혜와 평강이 넘치시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September 9, 2011
뉴욕을 한없이 사랑하는 사람
 

주님의교회 김상태 목사(Th. D.)  

[펌] [칼럼/참빛칼럼]인터콥 이슈

About/About Miss0n 2011. 9. 26. 07:32 Posted by harim~♥
원문 : 보기

[칼럼/참빛칼럼]인터콥 이슈
기사입력 2011-09-24 오후 6:16:00 | 최종수정 2011-09-24 오후 6:16:00

올 초봄에 다윗의 장막의 영에 대한 이슈가 제기되어서 이에 관한 칼럼을 썼었던 기억이 아직도 가시지 않았는데 요즘 재차 같은 문제를 또 이슈화 삼고있는 교계의 현실이 퍽 답답하게 느껴진다이런 동일한 문제거리 제기의 빌미로 어떤 선교단체를 볼모로 삼고있는 듯한 모습마저 비춰져 너무 유감스럽고 씁쓸하기 그지없다.

관련 칼럼 기고자는 표제를 바꿀때마다 새로운 사람들을 공격의 대상으로 선보이며 참으로 많은 다양한 원색적인 표현들을 현란하게 구사하지만 전체적인 내용을 종합해보면 순환적 논리로 인한 동어반복이 주를 이루는데다 쟁점의 원인은 너무도 단순한 바 개념 이해에 대한 차이로 파악되며 종국에는 스스로 자기논리적 모순에 빠져 상대를 인정하는 설명을 하고있다.

참고로 부언하자면순환논리에서의 원인은 복수로 검증이 되어야한다. “인터콥이 이단인 이유는 IHOP을 좋아하는데 IHOP이 이단이기 때문이다” 라고 하는 주장이 성립되려면 인터콥을 이단이라고 하기 전에 IHOP의 이단이 증명이 되어야 하고,또 다른 곳에서 IHOP을 이단이 아니라고 하는데가 없어야 하는 것이다.  만약 다른 곳에서 IHOP을 이단이 아니라고 하는데가 있다면 인터콥은 이단이 될수 없는 것이다.

또 마찬가지로 IHOP이 사도적 신앙의 계승자가 되려면 성경에 충실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므로 사도적 신앙의 계승자가 아니며 그러기에 이단이라면두가지가 증명이 되어야한다첫째는 IHOP이 성경에 충실하지 않다는 것과 둘째는성경에 충실하지 않은 것이 이단이라는 증명이다.

그런데 성경의 충실에 관한 이슈는 성경 해석의 다양한 관점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체험적 은사까지 연결되므로 폭넓은 조명이 필요하다성령의 음성을 듣는 것이 일상화된 신앙인이 있는 반면에 이것을 정체불명의 괴음성으로 여기는 신앙인도 있기 때문이다.

또 성경충실을 주관적인 소견에 가두어 이단으로까지 연결시키는 발상은 다분히 논리의 비약을 넘어선 논리의 부조리라 생각된다   

첫번째의 불충실한 성경적인 이슈중 대표격으로 거론되는 것이 다윗의 장막의 영이며예언은사와 신부운등이므로 이에 관한 소견을 피력하고자한다.

한편 순환논리에서 원인을 증명하려면 계속 원인규명이 점층적으로 확장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안에 안전지대의 심리때문이라고 한다:

 우리는 안전지대를 넘어서서 원인을 확장하려 하지 않는다안전지대를 넘어서는 것은 불확실성의 세계에 진입하는 것이고 이러한 불확실성은  존재만으로도우리의 판단력을 마비시킬  있다. /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안전지대 안에서  이상 다른 결과가 없다면 찾는 것을 포기하고 동어 반복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하지만 안전지대를 넘어서서 생각하는 것을 멈추지 않도록 훈련할 필요가 있다우리가원인을 아무리 확장하고 싶어도 확장된 원인들은 언젠가는 다시 수렴하게 되어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라는 질문을 통해서 도달한 원인이 추상적 실체를 포함하게 된다면 그것을 올바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아야 한다그것은 진실이 아닌 가설일 뿐이다(구글 펌 테스팅 히치 하이커 안내서”)”

위의 내용에서 불확실성의 세계에 진입과 판단력 마비의 표현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이것은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던져주는가본질적으로 불확실한 하나님 나라에 대해 우리의 판단력을 함부로 사용하지 말것을 시사하는 주의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또 추상적 실체를 진실이 아닌 가설로 이해하여 원인무효화 시키는 자세에 우리 기독신앙인은 큰 교훈을 얻어야 한다왜냐하면 신학은 초월적 실체를 다루기에 이 보다 더 폭넓은 이해를 요하며 신중에 신중을 요하는 분야이기 때문인것이다.  세상학문에 임하는 자세도 이와 같은데 하물며 하나님의 학문임에랴

1)최근 이런 류의 논리를 펴는 분의 다윗의 장막의 영에 대한 이슈제기는 대략 다음의 세가지로 요약된다 

1.    24시간 다윗의 장막의 영의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전 시절의 개념이다.

2.    하나님을 방치하지 말고 24시간 기도와 찬양속에 거하게 한다는 법궤시대의 신앙개념이다.

3.    다윗의 장막은 신약후 우리 몸속에 들어왔다삶과 인격과 생활의 전 영역 속으로 이동되었다.  성령께서 친히 오시고 내주하는 것이 다윗의 장막이다.

답변을 드리지면 다음과 같다:

1.    다윗의 장막의 영은 바로 성령 하나님이시므로 예수 그리스도 전이나 후나 똑같다.

2.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법궤에만 모셔졌다는 개념은 불충분하다구약의 하나님의 영도 보편적인 성령역사의 기록은 아닐지라도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70인 장로와 엘리사의 기도등 사람들에게 역사한 많은 예들이있다11; 2,3; 4,5,6.). 이것을 부인하면 도리어 양태론적 이단이 된다: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소산을 베푸시며 땅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신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42:5)” 에스겔 39 29절은 "내가 다시는  얼굴을 그들에게 가리우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신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쏟았음이니라(39;29)”

3.    다윗의 장막은 신약후 우리 몸속에 들어왔다삶과 인격과 생활의 전 영역 속으로 이동되었다.  성령께서 친히 오시고 내주하는 것이 다윗의 장막이다.” 라고 설명함으로써 실제 문제 제기자는 성령께서 친히 오시고 내주하는 것과 다윗의 장막을 동일시 하고있다 그러므로 다윗의 장막의 영으로 기도하는 것은 문제가 될수 없다는 것을 시인한 셈이다.

2)두번째로 예언은사는 구약적 예언자적 개념이 아닌 신약적인 예언은사로서 말씀과 기도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신앙인에게 나타나는 것이기에 훈련과 시행착오가 따른다고 본다.  즉 특별계시의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개인적인 영적 교제의 수단으로서 주어지는 것으로 이해해야한다 그리고 예언의 내용은 개인에게 향한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인것으로 운명론처럼 노력없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것이다.

순환논리의 함정인 모순적 사고는 이런 류의 예에서도 두드러지는데 뉴욕 모교회의어떤 목사님이 사도적 사명을 받았다는 예언을 받고서 도리어 교회를 사임하게 되었으니 받은 예언이 틀렸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주장자가 이단 이슈를 교계에 무모히 제기하여  교회의 분란을 부채질했다면 모종의 반성과 회개가 있어야하는데 도리어 자신의 역할은 제쳐두고 결과론적판단으로 예언의 부당성 운운 하는 것은 정말 억지논리로 기독신앙인으로서 상식밖의 일이다
.

 목사님이 사도적 사명을 받았다는 것과 교회사임과 무슨 연관이 있는가 반문하지 않을수 없다핍박없는 사도직이 없었다는 점을 감안할때에 오히려 고난의 부딪힘이 그의 받은 바 예언의 신빙성을 더 해준다는 생각이든다예수님도 사명을 받으셨지만 방해자로 인하여 붙잡히시고 십자가에 달리셨다그러나 하나님은주신 사명을 끝까지 관철시키시는 분이 아니신가
?

이런 주장이야말로 예언을 기복적으로 해석해서 나온 발상일뿐만 아니라 사람의 에이전트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에 대해 전혀 이해가 부족한 소이라고 밖에는 달리 이해가 안된다

3)세째로 지적한 신부 정체성 회복은 지극히 성경적인 내용이며크리스찬인 우리는 천국을 열망하며 저마다 하나님의 특별대사라는 엘리트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해영혼구원을 위해 고군분투하며 아가서의 말씀대로 음부보다 강력한 사랑으로 무장하여 세상의 악을 제압해야 할 그리스도의 군사로서의 사명이 있는 것이다.

이런 내용은 요한계시록 뿐만 아니라 성경 도처에 있는 내용이기에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고있는 일반성도들이라면 이미 거의 알고있는 지식이다 그러기에 혹자가 비난하는 바거짓허황미혹불건전착각마귀엘리트의식등과는 거리가 먼것이다.

성경은 확고부동한 영분별의 기준을 요한일서의 말씀(4:1-6)을 통해 제시하고있다예수그리스도가 성육신 한것을 믿고 고백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임이 증명된 자들이라고 말씀한다.  세상에 속한 자들은 세상의 말을 듣지만 하나님께 속한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분별해야 한다.

당시 거짓 선지자는 사도와 대립한 자들로서 신인양성을 부인하는 영지주의 이단사상자들이었고거짓 사도들은 율법준수를 구원의 조건으로 가르치는 자성령의 풍성한 능력이 나타나지 않고 계시의 복음 대신 자기 말을 전하거나 사심으로 섬기는 자들이었다(고후11).

아마 바울의 기준으로 보면 현세대의 목회자들도 거짓 사도의 수준에서 자유로울 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반문하지 않을수 없을것 이다 깊이 관찰하면 교회안의 이단도 엄밀히 존재한다고 보아야한다 이와같은 현실을 고려하여 성경은 다소 까다롭지 않게 이단 규정을 세워놓은지도 모른다.

한편 걸핏하면 예언과 선지자의 종속여부의 이슈로 혼란을 만들어내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처사라고 생각한다.  사도적 영성이 승계되듯이 예언자적이고 선지자적 영성도 얼마든지 승계될수 있기 때문이다.   그날에 내가 우상의 이름을 이 땅에서 끊어서 기억도 되지 못하게 할것이며 거짓 선지자와 더러운 사귀(邪鬼)를 이 땅에서 떠나게 할 것이라(13)”과 요엘서(2:28)의 말씀이 이를 시사하고 있다.

스가랴서의 말씀은 메시야 시대에는 친히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성령으로 말씀하시는 시대가 도래할것을 예언한 것이고요엘서의 말씀은 예언과 꿈과 비전이 오늘날에도 있는데 다만오늘날 일반적으로 주어지는 예언이상은 특별계시의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개인적인 영적 교제의 수단으로서 주어진다고 이해를 하면 되는 것이다(요엘2:28).

그러므로 예언이 틀리다고 가짜 선지자니 성토할 이유가 없는 것은 그 비판자체가 구약의 특별계시적 선지자 개념을 오늘날에도 인정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그러므로 가짜 사도나 가짜 선지자는 예수의 성육신을 인정치않는 이단신앙에 적용되어야 한다고 본다.

기독 신앙에서 특별히 강한 성령의 역사의 체험으로 예언적이고 선지자적 은사를 받은 리더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전하는 음성을 어디까지나 그들이 개인적으로 하나님과의 교제중 받은 음성으로 참고하면 되는것이다. 

요컨데 중요한 핵심은 하나님과 친밀한 영적교제인 것이며영적체험도 등한히 할수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성육신을 믿음으로 고백한 바개인적인 영적체험을 나누는 믿음의 형제들을 이해가 안간다고 해서 무턱대고 영분별의 잣대로 비판하는 자세는 정도에서 벗어난 무분별한 처사라 생각되는 것이다.

40일 금식기도를 한 형제는 그렇지 않은 형제보다 마음의 자세도 남다르고 자연 성령의 은사와 체험이 풍성할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성령의 역사가 풍성하다고 해서 가시적인 역사만을 추종한다든지 말씀이 약한 것으로 깎아내리는 우를 범해서는 안될것이다인격문제 운운 하는 것도 무리인 것은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시므로 겉으로만 판단해서도 곤란하기 때문이다.

요즘같이 교육수준의 균등이 이루어진 세대엔 이런 형제들에게서 더욱 말씀의 능력도 함께 풍성하게 넘쳐난다는 것을 깨달아야할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는 그들의 체험을 존중하고 경청하고 나누고 또 부족한 것은 서로 돕는 태도가 바람직한 것이다  

신앙생활에 남다르게 생명을 걸고 총력을 기울이는 형제들이 있다면 저들을 위해 기도해줘야 할 우리가 도리어 자신의 활약으로 주님의 재림을 준비성취하는 것처럼 착각한다고 비난의 화살을 쏘아대는 것은 기우요 넌센스라 생각한다.  저들이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라 주장하지 않는바에 비록 그렇게 보인다 할지라도 걱정할게 없음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오직 예수님이 하시기 때문인것이다. 

“그는 아무 때에나 오시지 않습니다그분은 전 세계의 하나님의 사람들이 성령의 기름부음 아래에서 신부의 정체성을 가지고 중보를 부르짖을 때까지 오시지 않습니다.” 비판의 글로 올린 이 내용이 필자에게는 한없는 소망이 되고 격려와 도전이 됨을 고백하지 않을수 없다.  할렐루야!


 박현숙 목사(프린스톤참빛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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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과 이단 논란

Gossip 2011. 4. 26. 18:48 Posted by harim~♥

대한민국과 이단 논란

 

KAICAM 고문 김호식 목사

대한민국은 1948년 8월 15일에 독립을 선언함으로 창설된 국가였다. 이렇게 새로 창설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을 표방하여 모든 권리와 정당성을 국민에게 있음을 선포했고 새롭게 제헌국회에서 제정된 헌법에도 신앙양심의 자유, 언론결사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 등이 성문화하여 모든 국민의 기본 권리로 설정되었다.

 

중국에서 헌장에 성문화된 것과는 달리 유교와 그 풍습이 사실상 국교와 같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고 일본의 신도가 사실상 국교화한 것과는 달리 대한민국에는 국교란 없다. 4,200년 이상의 역사에도 왕실이 특정 종교를 선호하였던 적은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왕조의 선호에 불과했다. 신라왕조에서 한 때 불교를 선호했던 것이 고려왕조에 넘어왔고 고려왕조를 타도하고 조선왕조가 건설되었을 때 자신들의 쿠데타를 정당화하는 일환으로 불교를 제외하고 유교를 선호하였다. 그러나 한민족의 역사에는 국교란 한 번도 없었다. 종교는 어느 때나 개인의 선택에 맡겨 있었고 정부가 특정한 종교를 믿게 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서방 유럽에 분포되었던 기독교는 한국의 역사와는 근본적으로 달리 작용하였다. 오순절에 성령의 역사로(사도행전 2:1-참조) 기독교회가 탄생하였다. 이렇게 탄생한 기독교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공생애 마지막 주간에-아마도-유월절 만찬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가에서 이루어졌던 사건의 실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께서는 두로와 시돈 등 이방인의 영역에 가서 사역하시고 유다 지방으로 돌아오시는 길에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마16:13)고 물으셨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누구였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제자들은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마 16:14)라고 하더라는 답을 하였다. 이 같은 이론에 만족하지 못하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는(제자들)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5)고 물으셨다. 어느 때나 모든 일에 적극적이었던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고 답했다.

 

이 베드로의 답은 예수는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시라는 고백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구약의 선지자들이 오시는 메시아에게 붙여주었던 별명에 해당하는 호칭이다(시 2:7-8, 삼하 7:14-15). 따라서 베드로의 답은 예수는 이스라엘의 통치자로 오실 메시아라는 답에 해당하였다. 예수님께서 3년 5개월간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선포했고 표적(마 8:-12:-)을 보임으로서 메시아이심을 증거 하시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는 방법으로 예수가 메시아가 아님을 유언비어로 살포하였다.

 

이 같은 지도체제가 조작해 낸 유언비어는 유다 백성의 유기적 역사상의 특성상 많은 백성이 믿었고 예수님께서 악령에 사로 잡혀 벙어리가 되었고 귀머거리가 되었던 사람에게서 악령을 내어 쫓아 치유하였을 때 바리새인들(지주계급으로 귀족 행세를 하고 있었던 자)이 예수는 바알세불(사탄)을 힘입어 악령을 내쫓고 있을 뿐 다윗의 자손-메시아-은 결코 아니라고 선동하였다.

 

이렇게 유다의 지도체제에 의해 예수가 메시아이심을 부인하는 여론이 지배적인 상황에서도 “예수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것에 대해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알게 하신 것이라고 칭찬하셨다.

 

18절(마16:)에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원문에 사용된 접속사를 옳게 이해하는 경우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에는 자신의 전반부 사역을 이해하기는 하였으나 “내가 새롭게 너희들에게 할 말이 따로 있다는 뜻을 드러낸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를 돕기 위해 마태복음의 내용을 정리하면 이스라엘 무리들이 바리새인들의 선동에 넘어가(마 9:33-34)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도 이는 다윗의 자손일 수가 없는데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실 수가 있는가? 의아해 했을 때 예수는 이스라엘의 ‘무리’들조차 현혹자들의 유혹에 넘어가 자신을 배신한 것을 느끼셨다(마 12:23의 원문은 부정적인 답을 요구하는 질문법으로 다윗의 자손임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 부인한 상태에서 생각에 혼돈이 일어났던 것을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지도체제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무리)들에게까지 배척당하신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사역의 본질을 바꾸셨다. 다윗의 자손으로 이스라엘 왕으로 자신을 제시하였고 표적을 통해 그 증거를 제시하였으나 이 같은 사역은 실패로 끝이 났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천하 만민이 복을 얻게 하실 분”(창 22:18, 갈3:16참조)으로 사역의 양상을 바꾸셨다. 이 같은 사실을 보고 들었던 요한이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라고 이스라엘에게 예수를 소개하였다.

하나님의 어린 양이란 유월절의 희생제물을 상징하는 것으로 만인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희생제물이 되실 것을 예언한 것이었다.

 

이 같은 사건에 비추어 볼 때 마태복음 12장 22-23절에서 배척 받으셨던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과도기적인 준비 과정을 거쳐(마 13:-15:-) 마태복음 16장 18절에서 자신의 교회를 창설하실 것을 선포하셨다. 다시 말하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이방인들을 포함한 구세주로서 구원의 역사를 실현할 교회를 창설하실 것을 선포하셨다. ‘이 반석’ (Ⅴ.18)이란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킨 말로(고전 3:11, 고전 10:4)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이스라엘의 메시아라는 뜻의 어구일 뿐 그리스도의 교회의 터는 아닌 것이 확실하다.

 

16세기 초반에 일어났던 종교개혁 운동은 결국 개신교를 형성하였다. 로마교회의 체제와 횡포를 반대하여 새로 형성된 교회라는 뜻에서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교회가 발생하였다.

사탄은 종교개혁이 일어나 새로운 교회들이 생길 때 낮잠을 자거나 지구 밖 어디 휴가를 갔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부정과 부패, 잘못된 교회 전통이나 제도를 박차고 나오는 개신교 세력에 잠입하여 교단제도를 설립하게 하였다. 교단은 문예혁명의 결과 새롭게 형성되어 가고 있던 민족단위 국가제도에 편승하여 민족 또는 국가단위의 국교제도가 형성되었다. 그래서 루터란이 스칸디나비아 삼국에 수립되어 국교가 되었고 칼빈주의가 네덜란드에 들어가(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벨기에) 신칼빈주의로 변질되어 개혁교회라는 이름으로 국교가 되었다. 칼빈주의가 스코틀랜드에 들어가 장로교라는 교단으로 국교화 하였고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영국에 들어가서는 성공회가 영연방의 국교로 채택되는 반면 에피스코플이나 회중교회들이 개신교 세력의 다양성을 드러냈다.

 

국교제도가 형성되었을 때 모든 국민은 이론상 국교만을 믿어야 했다. 따라서 옳고 그른 것과는 상관없이 국교의 교리에 상반되는 교리를 주장하거나 실천하면 ‘이단’으로 정죄되었고 처형되는 것이 통례였다. ‘이단’으로 낙인을 받으면 국경 밖으로 축출되던지 처형당하는 것이 유럽제국의 관례였다.

따라서 대한민국은 국교가 없는 상태인데 이단 시비를 하는 것은 16-17세기 유럽의 역사상 발생하여 정착하는 과정에서 있었던 사건을 받아 들여 자신이 믿는 이론과 조금이라도 차이가 있는 이론을 주장하든지 성구 해석상 차이가 있는 해석을 하면 이단으로 정죄하여 신앙양심의 자유나 언론 및 자유로운 학문 활동을 억제하는 중세의 야만행위를 반복하는 행위이다.

 

‘이단’이라는 술어조차 현대의 민주사회에서는 완전히 제거되어야 한다. 만약 일관성 있게 장로교인이 신앙의 순수성을 주장하여 달리 믿는 사람들에게 신앙 및 양심의 자유를 허용치 않는다면 감리교, 성결교, 오순절-순복음 및 침례교를 이단으로 정죄할 수밖에 없다.

반대로 침례교인들이 자신의 신앙의 절대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이단논란을 제기하려면 로마교회, 루터란교회, 장로교회, 감리교회, 성결교회, 오순적-순복음교회 등 전체를 이단으로 정죄하여야 한다.

똑같은 이론이 어떤 교회에나 적응되어 유럽에서처럼 종교 문제를 놓고 백년전쟁, 30년 전쟁 등 마지막 종교 하나만 남을 때까지 전쟁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이단시비란 자신의 교단의 정책 또는 교회만이 만고의 진리임을 주장하는 어리석음의 소산이요 다른 교회의 존재나 실천은 전혀 용납할 수 없다는 어리석은 편견의 산물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를 국시로 형성된 새로운 국가로 신앙 양심의 자유 및 언론 출판의 자유, 학문 및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는 국가이다. 따라서 민주공화라는 국시에 어긋나지 않고 일반 도덕 및 사회의 질서를 파괴하지 않는 경우 다른 것을 믿거나 실천한다고 해서 ‘이단’시하는 것은 자신이 믿고 있고 속해 있는 교단의 무능함과 교리 및 신학의 빈곤을 노출하는 비열하고 통탄스러운 반항에 불과하다.

 

개신교는 처음부터 루터란, 칼빈주의, 쯔빙글리의 노선, 마르틴 부서의 노선, 알미니안주의 등으로 다양하게 발전하였다. 따라서 한 교단에 다른 교단을 이단시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교단만이 유일한 교단임을 역사적으로 또 신학적으로 증거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자신들의 신앙노선이 발전되는 일에 신경을 기울일지언정 달리 믿고 행하는 사람들에게 이단 시비를 거는 등의 만행은 즉시 중단되어야 한다.

 

결론

 

종교개혁의 산물로 각종 개신교회들이 발생하였다. 개신교의 특성은 “성경이 신앙과 행위의 궁극적은 권위”라는 원리였다.

따라서 개신교임을 주장하는 교단이나 이에 소속된 개인 신앙인의 경우 궁극적은 권위인 성경 말씀을 옳게 배워 이해할 뿐 아니라 실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사항이다.

성경은 1000여 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책이다. 성경 안에는 우주론, 존재론, 인식론, 윤리도덕론 등 인간에 필요한 모든 지식이 들어있다. 따라서 성경의 내용이나 그 사상 및 교훈을 제대로 배우기 위해서는 한 사람이 그 생애 전체를 바쳐도 부족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계시로 알려진 성경을 읽고 배워서 성경의 근본사상과 신학을 옳게 실천할지언정 다른 사람들의 신앙노선이나 신학에 대해 시비를 하거나 비평적 태도에 빠져 들어가는 것을 있을 수 없고 반드시 조속한 시일 내에 중지되어야 할 일이다.

 

∙KAICAM 고문 김호식 목사

∙Dallas Theological Seminary(TH.D.)

∙워싱톤 침례신학대학 교수 및 학장

∙콜롬비아 한인 침례교회 담임목사

∙한국성서대학교 총장

∙한국성서대학교 대학원 원장

∙현)한국성서대학교 교수



P 이원희님의 파란블로그에서 발행된 글입니다.